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죽음의 땅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등록 2009.10.19 15:38수정 2009.10.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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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 주말의 여유를 만끽하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내 손은 한 영화 채널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영화 제목은 <킬링필드>.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대학 4년을 마무리하며 떠났던 졸업여행, 우리 학과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동남아 코스를 알아보았다. 여러 나라 중 사학과의 특성을 살려 마지막으로 선택된 곳은 유서 깊은 유적지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였다.

베트남 호치민을 거쳐 밤이 다 되어서야 도착하게 된 나라 캄보디아. 우리는 안내하시는 분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일주일 간의 여정을 다시 한 번 숙지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시차적응을 할 새도 없이 꼭두새벽에 기상하여 간편하게 여장을 꾸리고는 숙소를 나섰다. 우리가 둘러 볼 곳은 킬링필드(killing field). 그곳은 폴 포트 공산 정권 하에 전 국민 중 1/3에 달하는 삼백만 명이 학살당했던, 말 그대로 죽음의 장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 중 가장 먼저 가게 된 곳은 뚤슬렝박물관이었다. 당시 정치범 수용소로 쓰이기도 했던 그곳에는 끔찍하게 고문당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한 그림과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그들의 얼굴에는 백가지 감정이 묻어 있었다.

경악, 공포, 아픔, 슬픔, 좌절, 절망, 분노… 그 중 나의 가슴을 가장 아리게 했던 것은 체념이었다.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힘없이 안고 있는 어머니의 체념어린 눈 속에는 빛이 없었다. 소망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자유조차 허락 하지 않는다는 듯 온통 철조망이 둘러쳐 있던 지옥 같은 수용소! 그 벽과 바닥 곳곳에는 아직도 채 지워지지 않은 혈흔이 남아 있었으며, 이를 둘러보는 나의 가슴 속에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학살을 즐기는 광기어린 짐승과 이유 없이 학살당해야만 했던 비참한 짐승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유골 발굴 당시 사진
유골 발굴 당시 사진신혜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학살당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묻힌, 일종의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에 박힌 희끗희끗한 반점들의 정체가 채 캐내지 못한 수많은 뼈들이란 소리에 한 번 자지러지고, 아이들의 발목을 잡아 나무에 패대기쳐 죽이거나 아이를 원반처럼 공중에 던져 총으로 쏴 죽이고는 무더기로 쌓아 버렸다는 소리에 또 한 번 자지러지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네들의 비명이, 고통이, 뿌리 깊이 맺혀 있을 그 나무는 아이들의 살과 피를 머금고 자란 탓인지 유난히도 크고 어두웠다.


그곳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돌아보았을 때, 거대한 위령탑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구의 유골이 쌓여 마침내는 탑을 이룬 곳…. 그 날의 슬픈 기억은 유족들의 미어진 가슴 속에 아직도 그대로인데 그곳의 나무들은 시리도록 푸르기만 했다. 그 날은 비가 내렸다. 비는 끝을 모르게, 쌓여 있는 해골 탑에서 흐르는 것인지, 그 참혹함에 할 말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얼굴에서 쏟아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슬픔이 온 땅 가득 내려앉았다…….

잠시 음습한 역사의 어두운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이윽고 다시 영화로 눈을 돌렸다. 영화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만큼이나 참혹하고 서글펐다.

죽음의 땅 캄보디아. 30여 년 전 그날, 대부분의 어른들이 학살당했기 했기 때문에 현재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슬픈 나라.

이 땅 위에 민주를 꿈꾸며 처절하게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정의가 회복되고 자유가 살아 숨쉬는 그런 푸르고 푸른 날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생의 불꽃을 살랐노라고. 비록 지금은 살을 에는 겨울이 온 대지를 덮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초록을 입은 봄이 찾아오리라 믿기에 그들은 오늘도 이 땅을 수호하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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