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록서당지훈이 한문을 배운, 주실마을 신교육의 전당이었다.
장호철
안동에서 입암과 영양읍을 거쳐 일월 쪽으로 접어들자 가로의 나무와 주변의 빛깔이 짙어진다. 이도 위도의 탓일까. 주실마을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정작 마을은 보이지 않고 에스자로 굽은 도로 양편으로 펼쳐진 주황과 노랑빛이 뒤섞인 마을 숲이 한눈에 들어왔고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가 세거해 온 오래된 마을이다.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개화를 받아들인 진취적인 고장이다. 양반마을이라면 꼬장꼬장한 선비들의 외곬이 연상되겠지만, 정작 시인의 선조들은 유교적 전통을 이으면서도 인습은 과감히 떨쳐 버렸다.
박정희 정권 때의 '가정의례준칙'이 바로 이 마을에서 유래된 것은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을 따른다고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력설을 쇤 것도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다 모일 수 있어서였다. 이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던 합리주의자였던 셈이다.
'삼불차(三不借)'를 지킨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마을 어귀에 전통 한옥 형식으로 커다랗게 지어놓은 조지훈 문학관을 우리는 건성으로 한 바퀴 돌았다. 시간에 쫓긴데다가 내겐 그런 형식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있다. 현실적으로 한 인물을 기리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입구 자 모양으로 덩실하게 올린 문학관은 내게 마치 지방자치시대에 시나브로 상품화하고 있는 '문화'의 표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은 마을 앞 들판 너머 문필봉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서 있었다. 솟을대문 앞 커다란 바위에다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 새겨져 있다. 맞배지붕의 口자형 전통한옥인 종택은 그리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호은은 한양 조씨 입향조 조전(趙佺)의 아호로 그는 1629년(인조 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구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7칸이고 앞면 사랑채가 정자 형식인 이 종택에서 지훈은 호은의 14대 후손으로, 제헌·2대 국회의원이었던 한의학자 조헌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짐작하였겠지만 그의 가계는 만만찮다. 지훈은, 한일합병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한말 의병장 조승기,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항거하다 자결한 지훈의 조부 조인석 등이 태어난 이 종택의 태실에서 태어난 것이다.
개화와 새로운 시대를 무난히 받아들이긴 했지만,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호은종택에선 예부터 '삼불차(三不借)'를 지켰다 한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말로, '인물'을 빌리지 않고(즉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 '재물'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것을 이른다.
다른 가문의 '인물'을 빌리지 않는다는 데에 이들의 고집과 기백이 드러난다. 그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만만찮은 선언인 것이다. 그런 기백과 정신이 '지조론'의 시인이자 지사였던 지훈을 낳은 것일까.
'지조론'으로 도저한 선비의 기개를 밝힌 지훈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돕던 지훈은 경찰의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들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단체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시 몇 편 발표로 시인이겠냐며 붓을 꺾어 버렸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유당 정권 말기에도 독재에 항거하는 민간단체에서 활동했다.
주실마을에는 오래된 고가가 많다. 호은의 증손 조덕린의 옥천종택, 문중의 서원 노릇을 했던 창주정사, 지훈이 한문을 배웠던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등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일찍 개화한 마을답게 마을 한복판에는 교회가 서 있다. 독실한 기독인인 아내조차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즐비한 고가와 담장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형상의 그 콘크리트 건물이 좀 '거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