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고전으로 부활한 인간 전태일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52] 조영래 <전태일 평전>

등록 2009.11.13 15:12수정 2009.11.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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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전태일 평전 ⓒ 아름다운 전태일

▲ <표지> 전태일 평전 ⓒ 아름다운 전태일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이 작가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조롱했듯이, 80년대 전쟁 같은 노동을 끝내고 새벽 쓰린 가슴으로 찬 소주를 마시던 노동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노동 해방을 추구했던 시인이 얼굴 없는 시인으로 활동했던 것처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도 출간 당시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

 

80년대 광주를 붉게 물들이고 집권한 5공화국의 서슬 퍼런 권력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의 출간에 대해 우려했던 대로 시판 중지를 종용하고 출판 기념회는 원천 봉쇄되고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신속하게 연금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독자들을 확보했다. 금지곡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금서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 또한 신속했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바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학생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언제나 포함되었던 책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6월 항쟁 후 <전태일 평전>으로 개정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개정판이 나왔다. '어느 청년 노동자'라는 우회적 표현을 버리고 '전태일'이란 이름을 직접 드러내어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을 붙였고, 저자명 또한 '전태일 기념사업회' 대신에 '조영래'란 이름을 밝혔다. 불치의 병에 시달리던 저자는 안타깝게도 개정판이 나오기 며칠 전 세상을 떴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연이어졌던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행여 이 책이 그러한 죽음들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았나 자책하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저자의 마음이 숨김없이 표현된 것이리라.

 

사람들은 전태일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까. 대부분이 근로기준법 책을 불사르고 그와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죽음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의 죽음 이후 나타난 변화에 주목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신영복 교수는 죽음의 의미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전태일을 이야기할 때 저마다의 작은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 않는가 돌아보면서 그의 삶 속에 들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먼저 읽어보자고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인간 전태일의 고뇌와 사랑

 

친일파 후손들이 부귀와 영화를 거머쥐고 해방 후까지 활개치고 살았던 것과는 달리,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 속에서 온갖 설움을 당하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태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힘든 일을 다 하며 살다가 처녀 시절에는 정신대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광주리 행상, 문전걸식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온갖 종류의 노동에 시달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처자식과 몸뚱이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없었던 전태일의 부친은 가족들을 이끌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와야 부귀와 영화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무작정 상경한 이들을 반겨 맞아줄 사람은 서울에 아무도 없었다. 부귀와 영화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은커녕 변변한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한 채 좌절의 나날을 보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무능한 가장들에게서 나타나는 폭음과 주정, 부부싸움, 폭력 등이 뒤따랐다.

 

허리띠 졸라매고 모은 돈으로 재봉틀 한 대 장만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일시적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4.19 혁명 직후 브로커에게 엄청난 사기를 당하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으면서 또다시 끝 모를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전태일은 어려서부터 학교 대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가 벌어온 돈이 가족의 생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냉혹한 사회 현실에 짓눌려 허덕이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몇 차례의 가출도 한다.

 

무임승차를 해서 부산까지 가출했고, 남동생의 손을 잡고 가출 했고, 여동생을 등에 업고 식모살이 떠난 엄마를 찾아 가출을 했다. 그때마다 전태일은 죽음의 공포와 처절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몸서리치는 고통을 당하며 살았던 전태일의 가슴에 하나의 생각이 형성되었다. 그 생각을 전태일은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전태일의 수기 중에서)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되어 평화시장 재단사 시절, 점심 굶고 일하는 시다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두세 시간을 걸어서 퇴근하도록 했고, 각혈하고 쓰러지는 여공들의 참상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도록 했다. 휴일도 없이 야근까지 하면서도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바보회를 만들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지키려고 했던 전태일의 생각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부한 자들의 거름이 되는 현실에 저항해서 어린 소녀들에게 인간다운 삶과 꿈을 되찾아 주기 위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조영래 / 아름다운 전태일 / 2009 개정판 / 9000원

2009.11.13 15:12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조영래 / 아름다운 전태일 / 2009 개정판 / 9000원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2009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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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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