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엄마의 몸 밖으로 배출되어 죽게 되는(또는 죽어서 배출되는) 현상을 유산이라고 한다. 유산은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산모의 건강 때문에 인위적으로 유산시키는 경우를 치료유산이라고 하고 그 밖의 모든 인공유산을 선택유산, 흔히 낙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낙태가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형법에서는 낙태를 한 산모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낙태를 해준 의사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있다. 물론 모자보건법에서 강간에 의한 임신이거나 부모의 유전질환이 있거나,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경우 등 예외적으로 낙태가 허용되고 있지만 사실상 법적으로 낙태는 금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낙태에 대한 법률은 국가마다 다른데 허용정도에 따라 ①조건없이 합법, ②강간, 산모의 건강, 태아의 결함, 사회경제적요인 요인이 있는 경우 합법, ③강간, 산모의 건강, 태아의 결함 등을 제외하고는 불법, ④예외없이 불법 등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②번과 ③번의 차이는 출산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으면 낙태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인데 이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사실상 낙태가 합법인 셈이고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사실상 불법인 셈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낙태가 사실상 불법인 반면에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낙태가 완전 합법 또는 사실상 합법이다.
낙태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낙태의 천국이다. 임신주수가 10주 미만이라면 30만원 내외의 비용으로 대부분의 산부인과에서 당일로 낙태를 할 수 있다. 태아가 그보다 크더라도 비용이 더 많이 들고 큰 태아를 낙태해주는 산부인과를 찾아다니는 수고가 더해질 뿐 역시 별 어려움 없이 낙태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낙태가 이루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해 35만 건 정도 된다는 연구가 발표된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한해 우리나라의 전체 출생아 수가 47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낙태 건 수와 출생아 수가 같다고 하면 전체 임신부의 반이 낙태를 셈이니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50%가 된다. 네덜란드의 낙태율이 10% 정도이고 우리보다 인구가 6배나 많은 미국의 한해 낙태 건 수가 80만 건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 낙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낙태의 허용여부에 대한 논란에는 종교적, 도덕적, 문화적 측면이 함께 얽혀 있어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크게 보면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 할 것이냐 아니면 임신한 여성이 출산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우선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낙태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 된 적이 없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두 가지 상충하는 이해를 별 어려움 없이 조정하고 있다. 법률적으로는 낙태를 불법화해서 태아의 생명권을 최대한 존중하되 현실에서는 그 법률을 집행하지 않음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동시에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 방식으로 낙태라는 불편한 진실을 피해가는 것이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다. 먼저 출산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가족계획의 지상목표는 출생아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국가 주도로 온갖 방식의 피임방법 시행되었으며 낙태는 최후의 피임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 되었고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국가적 과제가 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낙태를 방조하는 것이 국가시책이었다면 이제는 낙태를 줄여서 출산을 늘리는 것이 국가시책에 부합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부인과 의사들 자신이 불법낙태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다. 산부인과 의사들 수백 명이 참여하고 있는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에서는 앞으로 불법 낙태를 시행하는 의사를 고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내부고발자가 나선 셈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인 현재의 상황이 어느 쪽으로든 정리가 되어야 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낙태를 불법화하고 있는 현행법을 강제하는 것이 낙태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법률을 엄격하게 시행하면 출산율이 증가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낙태를 처벌하기 시작하면 당장 외국으로 원정낙태를 가는 산모들이 늘어날 것이고, 낙태 암시장이 형성되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비싼 돈을 내고 낙태를 하게 될 것 이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높은데서 뛰어내리거나 성분을 알 수 없는 약물을 먹는 등 자가낙태를 시행할 것이다.
그래도 결국 태어난 '원치않은' 아이들은(대부분 미혼모 또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가정의) 고아로 수출되거나 자라서 오히려 사회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많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1990년대 범죄율이 전반적으로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20년 전에 시행된 낙태합법화의 결과로 흑인, 낮은 사회계층, 미혼모의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커서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아이를 낳기 어려운 사정(사회경제적 이유를 포함해서)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임신 초기에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다만 낙태를 할 때는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 예를 들면 상담절차 같은 것을 만들어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게 도움을 주면 좋을 것이다. 또한 태아가 사람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임신 중기 이후에는 낙태를 엄격히 제한함으로서 태아의 생명권도 같이 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청소년기부터 성교육을 철저히 실시해서 원치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하고 보육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낙태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히는 사회경제적 원인을 해소시켜줘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낙태법을 뒤집어보면 임신하면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하는 출산강제법이다. 법대로라면 한번 임신진단을 받으면 출산을 하든지 아니면 법이 정하는 낙태사유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 땅의 여성들이 그런 무지막지한 환경에서 살수는 없는 것이다.
2009.11.14 15:31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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