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사들과 함께 한 자리, 밥이 코로 들어간 이유

승진은 교사로서 '귤이 탱자로 변하는 회수'

등록 2009.11.23 17:34수정 2009.11.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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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청 장학사들과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우연히 그들과 같은 식탁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런데,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이 그토록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한 가운데에 국장이나 과장쯤으로 보이는 높은 사람이 앉고 양 옆에 나란히 장학사들이 자리를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물수건이나 수저, 젓가락 등을 챙겨주는 건 나름의 에티켓이라 그렇다 해도, 마치 가족인 양 상관의 입맛과 취향, 습관 등을 얘기하며 챙기는 '세심함'이 어색하다 못해 측은해 보였다.

음식은 놓였지만 장학사들은 눈치를 보느라 정작 자신들 식사는 뒷전이었다. 상관의 밥 주변 반찬이 떨어질세라 배달을 자처하는 통에, 함께 한 사람들 모두가 무척 불편해 했다. 그들의 '오버'는 외부인들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고,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식사 시간 내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라 했다.

기실 그들 대부분은 교사 출신이다. 처음에 어떻게 해서 교사가 되었고, 그들의 교사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 없다. 다만,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그토록 아이들 면면을 정확히 기억했으며, 수업 시간에도 그렇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아이들을 대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들을 통해 적잖은 이질감을 느끼면서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교직 사회에는 이러한 불문율이 있다. 승진해 장학사로 나가려면 수업보다는 점수에, 아이들보다는 상관에 훨씬 더 가까워야 한다는 것! 어차피 승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단 기간에 얼마나 많은 '점수'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인데,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아이들 상담이나 수업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

교사가 된 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내 눈에 비친 '교사 집단'은 절대 '동질적'으로 볼 수 없다고 확신한다. 보통 사람들은 흔히 '교사'에 방점을 찍고 일률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제대로 인식하자면 교사이기에 앞서 수십 만 명이 모인 '집단'이라는 점을 전제해둬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교사 중에는 그야말로 자질이 의심스러운 '양아치'가 있는가 하면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성자'도 있다는 뜻이다.

곧, 수십 만 교사들의 머릿속에는 수십 만 개의 교육철학이 존재한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수업 방식도 다르고 아이들을 상대하는 마음가짐도 다르며, 심지어 교사로서의 자질이랄 수도 있는 직업관조차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 하나를 풀어보자. 다음 중 교사 간 의식과 교육 철학의 차이가 가장 크게 나는 건 어느 경우일까?

(1) 남자 교사와 여자 교사
(2) 공립학교 교사와 사립학교 교사
(3) 남학교 교사와 여학교 교사
(4) 수도권 학교 교사와 지방 학교 교사
(5) 승진에 목 맨 교사와 승진에 관심 없는 교사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교사라면 누구나 '정답'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교사가 그럴 테지만, 부임 초기 남녀 성역할의 차이가 교사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할 것이라 여겼고, 남학생과 여학생 중 누구를 가르치느냐 역시 교사에게 더없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다 근무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사립의 차이가 교사들의 의식을 시나브로 변화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한 달이 멀다 하고 치러지는 시험과 성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보니 교사의 투철한 의지만으로는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극복해낼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러나 승진에 관한 인식 차에 견준다면 그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일단 승진을 염두에 두는 순간 교사의 삶은 외길에 들어선다. 여느 직장보다 훨씬 더 비좁은 사다리를 통과해야 하는 까닭에 그 길은 무척 복잡하고도 험난한 여정이다. 교사 개개인의 시간도, 품성도, 양심도, 능력도, 심지어 아이들에 대한 사랑마저도 획일화시켜버리는, 차라리 '블랙홀'이다.

흘린 땀방울(?)은 결코 배반을 하지 않는 법. 0.1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메뚜기처럼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학교 업무 중 점수가 걸린 일에 물불 가리지 않은 교사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진다. 정작 수업은 소홀히 하고, 아이들을 소 닭 보듯 했다며 동료 교사와 학생들이 손가락질 한다 해도 웃으며 감내할 수 있는 건, 승진이 그들을 모두 거느릴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승진을 위한 열망과 경쟁 과정이 같아서일까. 학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교장, 교감 등 관리자와 교육청의 장학사들의 성향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동소이하다. 어느 곳이든 교훈과 교육 지표가 판에 박힌 듯 똑같고, 과문한 탓인지 학교와 교육청이 상명하복의 관계로만 규정될 뿐, 서로 다른 교육관을 용인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는 얘기는 여태껏 듣지 못했다.

교장과 교감이 장학관과 장학사가 돼 학교와 교육청을 수없이 오가고, 젊은 피를 수혈한다며 적잖은 교사가 장학사가 돼 행정가로 변모해도, 학교 현장은 피폐해져만 가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만 가고 있다. 공교육 붕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엄청난 경쟁을 뚫고 '승리자'가 된 그들이 흘린 땀방울이 오로지 승진을 위한 것이었지, 학교와 미래 교육을 위한 열정은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걸까.

단언컨대, 교사는 승진을 염두에 두게 되면 이미 교사가 아니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직접 아이들과 부대끼려는 마음이 없다면 더 이상 교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때 교사였고, 열심히 노력해 이룬 개인적 성취는 인정한다고 해도, 교육행정의 전문가로 자처하며 책상머리에 앉아 볼펜이나 돌리는 사람들에게 교육은 '행정사무'의 일부일 뿐이다.

흔히들 그저 듣기 좋은 말이라고 흘려버리지만, 교사는 진정 '보람'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서로에게 거울이 되며, 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는, 그야말로 사람 냄새 가득한 직업이 교사이다. 근무평정이다, 교원평가다 해서 승진이 교사의 자질과 정비례하는 것처럼 사회를 향해 떠들어대지만, 믿고 싶은 '주술'일 뿐 정작 학교 현장에서 수긍하는 교사들은 거의 없다.

교사의 생명과도 같은 '보람'을 계량화시키기도 어렵거니와 그걸 평가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단지 학교 현장에 돈, 권력과 결부된 승진이라는 '미끼'를 던져놓고 많은 교사들에게 입질하도록 종용하려는 분위기는 교육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시간만 나면 아이들과 만나고 싶어, 수업하고 싶어 안달하는 교장과 교감을 만나고 싶다. 또, 교육장, 교육감 앞에서 서로 다른 교육관을 두고 '계급장을 뗀 채'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학관과 장학사를 보고 싶다. 군림하고, 통제하고, 지시할 줄만 알았지, 많은 교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죽비가 되고, 기꺼이 땡볕 아래 시원한 그늘이 돼주는 그런 '선배'들을 진정 만나고 싶다.

그런 '선배'들이 넘칠 때라야 비로소 교사의 승진을 두고 '귤이 탱자로 변하는 회수(淮水)'라는 비아냥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교원평가 #근무평정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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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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