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이며 세종시며 나라가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데,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문제에 대한 노사정 6자 대표회담도 11월 25일 어떤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고 결렬되었습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연대파업을 선언했고, 한국노총은 한나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2010년 1월 1일부터 복수노조는 허용되고 노동조합 전임자 임금지급은 금지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전임자 임금지급금지가 쟁점이지 복수노조는 허용하면 될 뿐으로 보입니다만, 저는 복수노조 문제가 더 걱정됩니다.
창구단일화가 복수노조 허용의 전제조건?
복수노조가 노조 상급단체, 곧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에 허용된 것은 1997년입니다. 그런데 기업 단위 복수노조는 내년에야 허용됩니다. 원칙으로 따지면 복수노조건 아니건 노동조합은 당연히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가지지요. 그런데 경영자들이 기업단위 복수노조에 대해 창구단일화를 요구하니, 2001년 3월 개정된 노동조합법 부칙 5조 3항에는 노동부장관은 유예기간이 경과된 후에 적용될 교섭창구 단일화를 위한 단체교섭의 방법, 절차 기타 필요한 사항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다 되어오는 지금, 노동부가 강구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노동조합 사이에 알아서 창구단일화하되, 합의가 안되면 조합원 과반수 넘지 못한 노조에는 어떤 권한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창구단일화는 복수노조 허용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단지 노사교섭을 어떻게 할지 실무적인 차원의 문제일 뿐인데, 노동부는 오로지 창구단일화를 지상과제로 삼아 복수노조 허용의 당초 취지도 무너뜨려버리고 헌법의 노동3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지키려는 한국타이어 노동자들
지난 여름, 대전 유성에서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한국타이어,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사위 조현범씨가 부사장입니다. 2006년 5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15명의 노동자들이 심장질환과 암 등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올 3월에는 산업의학자들이 타이어 생산시 쓰이는 카본블랙과 초미세분진, 유기용제 등이 뇌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키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협심증, 본태성원발성고혈압, 말초신경병증, 독성간염, 폐렴... 병명은 복잡하게 이어집니다.
여기도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이 계십니다. 수는 많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명색이 노조인데 노동자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이렇게 방관할 수가 있느냐고 분개하셨습니다.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분들을 만나고 무척 놀랐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일 없는 상황, 목숨이라도 지키게 해달라는데 노동조합도 모른 체 하는 비이성적 상황. 저는 이분들처럼 짓눌린 모습의 노동자들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전근대적인 사측을 상대로 말 한 마디 제대로 하는 노동조합이 아니어서 건강도 생명도 최소한의 자긍심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처럼 충격적으로 느낀 일이 없습니다.
한국타이어에 복수노조가 생긴다면?
복수노조가 예정대로 허용되기를 이분들은 바라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본인들이 나서서 새로운 노조를 만들어 지금의 노동조합과는 달리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과연 내년이면 그렇게 될까요?
아니요. 이분들의 기대는 실현될 길이 없습니다. 정부는 노사 자율로 창구를 결정하도록 하되 성사되지 않으면 조합원 과반을 확보한 노조에 교섭대표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창구단일화를 강제할 방법은, "끝까지 창구 단일화가 되지 않는다면 사측이 교섭을 거부해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쟁의행위도 모든 노조 전체 조합원 과반의 찬성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새로 만든 노조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새로 만든 노조가 당장 과반수 조합원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기존 노조와 사측이 집요하게 새로운 노조 가입을 막을 테니까요. 기존 노조가 새로운 노조를 교섭단에 끼워줄 리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망할 테니까요. 새로운 노조는 교섭권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쟁의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조합원이 아닌 기존 노조 조합원들까지 다 포함해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해야 하는데, 기존 노조 조합원들이 흔쾌히 나설 상황이 못 되고, 기존 노조는 여전히 소극적 자세로 반대할 것입니다. 새로 만든 노조만 파업하면 불법이라니 업무방해죄로 형사처벌되고 손해배상도 해야합니다.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고 단체행동할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조합,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습니다.
복수노조 허용의 속내
한국타이어처럼 소수 노동자들이 복수노조를 새로 만들려는 곳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일 사용자와 정부에 비판적인 노조가 있던 사업장에 입장이 다른 노동조합이 따로 만들어진다면, 사용자나 정부는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지요. 임금도 더 올려준다고 할지 모릅니다. 조합원 과반수를 휩쓸어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용자나 정부가 손 하나 대지 않고도 자신에게 비판적인 노조의 힘을 완전히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복수노조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헌법이 노동3권을 인정하는 근거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의 대립은 흔히 있을 수 있는 보통의 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때 약자인 노동자 개인으로는 대등하게 협상할 수 없으니 사람수 모아서 대등한 힘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이해관계의 대립을 불온시하거나 후진적 노사관계라고 치부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3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법률로 제한하지 않는 이상 어떤 노동조합에게도 당연히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사용자가 자꾸 피하기만 하면, 그 때마다 이행강제금 내게 해서 교섭을 강제하는 법적 절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용자에게 껄끄러운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소수 노조라는 이유로 교섭을 피할 변명거리를 마련해주고 단체행동권도 제약하고 결국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복수노조 허용의 속내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노사관계 선진화'의 이름으로 포장될 것입니다.
법률도 아닌 시행령으로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겠다니
더더구나 기막힌 것은, 노동부가 이 내용을 법률 개정 없이 행정 법규에 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거는? "창구단일화를 노동부 장관이 법으로 정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는 것이 노동부장관이 내세운 이유입니다.
노동3권은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입니다.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이 아닌 법률에 그 내용을 넣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법률로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헌법에 규정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노동부는 법률도 아닌 시행령으로 노동3권의 본질적 내용을 제한하겠다는 발상입니다.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생각입니다. 그 발상 자체만으로도 엄히 비판받아야 할 일입니다.
창구단일화 원하면 노동계와 합의해야
창구단일화가 복수노조 허용의 전제가 될 수 없고, 노동조합 활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정부가 그렇게도 창구단일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노동계도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협의하고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올 12월 안에 통과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법에 규정된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어느 노동조합에도 제한될 수 없고, 창구단일화를 강제할 수도 없습니다.
한나라당의 민본 21 의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차라리 기업단위 복수노조를 앞으로도 허용하지 않거나 유령노조 있는 곳만 허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예 또 다시 복수노조 허용을 1년 유예하자는 말도 나옵니다.
하지만 유령노조인지 아닌지는 또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10년 전에 모두 공감했던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이라는 원칙이 지금 달라져야 할 이유를 못 찾겠습니다. 한국타이어 노동자들께 더 기다리고 더 참으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한 달 뒤, 이분들에게 올 상황이 어떤 것이 될지, 조마조마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정희 기자는 민주노동당 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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