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 대한 긍정

웬수 같은 자식, 마녀 같은 엄마 (21)

등록 2009.12.10 10:41수정 2009.12.1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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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가 이게 뭐냐. 이 정도밖에 못하냐?"

 

한심하다는 듯한 부모의 표정이 가져다주는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아니 부모의 말소리에서 묻어나는 절망감만으로도 아이는 죽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좌절은 없다. 자기 성적 때문에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부모에 대한 자책감까지 더해지면 아이는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칭찬이라고 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칭찬이다. 하지만 칭찬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사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칭찬하고 싶지 않겠는가. 문제는 칭찬을 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데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기 자녀에게 맘껏 칭찬을 해주고 싶지만  무턱대고 잘했다고 칭찬만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뭔가 칭찬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칭찬을 해야 교육적이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는 어린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사실 별로 잘한 것도 아니지만(오히려 형편없는 쪽에 가깝지만) 부모들은 잘했다고 추켜세우며 아이를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부모들의 성원에 힘입어 아이들이 곧잘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재롱을 떨곤 한다. 그 덕분에 집안이 즐거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이러한 부모들의 공작(?)은 서서히 그 효력을 상실해 간다. 아이들도 인지 능력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한 행동이 별로 잘한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저 부모들이 분위기를 띄워주기 위해 하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직하지 못한 칭찬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오히려 아이에게 역효과를 가져다준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턱대고 칭찬을 남발하는 부모에 대해 아이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한다는 부모의 말만 믿고 다른 사람들(특히 또래 아이들)앞에서 자랑했다가 놀림의 대상이 되었을 때, 아이가 경험하게 될 난감한 상황을 상상해 보시라. 부모의 판단을 그대로 믿었다가는 언제 무슨 창피와 무시를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절절한 체험 앞에서, 아이는 거짓된 칭찬을 남발하는 부모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밖에 없다.

 

아이의 기를 살려 줘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객관성을 상실한 채 남발하는 일방적인 칭찬은 결코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존재인 부모의 거짓 칭찬 때문에 아이는 오히려 불신과 불안의 늪에 빠져들 수도 있다. 칭찬이 오히려 아이의 건전한 자아 발전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고 꾸중함으로써 아이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보다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이를 질타하는 것이 아이로 하여금 더 잘해야 하겠다는 의욕과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개 처음에는 부모의 꾸중을 들으며 깊이 반성하고 다음에는 잘하겠다는 결심과 각오를 선선히 보여주지만, 그게 본인의 결심처럼 잘 되어 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의례적으로 부모 앞에서 새로운 각오와 반성이란 행위를 일종의 의식처럼 되풀이하게 되고, 부모 입장에서는 그런 아이의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되며 아이 스스로도 사실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부모 입장에서는 잘하겠다고 말만 할 뿐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신뢰와 애정이 가지 않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매번 거짓 반성을 하게 되어 면목이 서질 않아 미안하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런 상황이 짜증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손쉽게 거짓 반성과 결심으로 그때그때 위기를 넘기거나 아니면 부모의 꾸중에 대해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다. 지금 잘했는지 못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아이 자신이 내리고 있다. 자신이 이룩한 결과에 대해 부모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느냐가 아이에겐 중요하다. 시원찮은 성적 때문에 부모에게 혼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혼나는 것은 그 시간이 지나면 끝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향해 갖고 있는 평가는 여전히 지속된다. 부모가 더 이상 아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믿을 수 없다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이는 부모의 인정을 얻고 부모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찮은 존재라는 절망감에 빠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해 간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이는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기 힘들다.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 아이에게 부모의 꾸중은 절망과 분노를 생산해낼 뿐이다. 성적이 안 좋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평가다. 부모의 기대와 욕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30등 하는 아이의 부모에게는 20등 하는 아이의 성적이면 꽤 좋은 성적이다. 하지만 20등 하는 아이의 부모에게는 안 좋은 성적이다. 10등 하는 아이의 성적 정도는 되어야 좋은 성적이다.

 

아이의 성적이 안 좋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아이에 대한 믿음 놓아버리게 된다. 부모의  욕심에 미치지 못한 아이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라고 말을 하겠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선고(인정받지 못함)로 받아들여진다.

 

성적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적이 안 좋다고 말하는 순간, 평가(정죄)가 된다. 이러한 평가는 짐이 되어, 아이에게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을 심어주고 더 나아가 아이에게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아 간다. 결코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좀더 나아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해라. 설령 더 나아지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지 말자. 그것이 인간 평가의 유일한 기준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2.10 10:41ⓒ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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