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많은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일본 문학의 대명사
문학사상사
일본 소설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소설<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가장 사랑받는 일본 작가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1949~)가 될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출간된지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사랑받은 대표작이라면 분명 <상실의 시대>가 거론될 것이다.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ノルウェイの森 )>보다는 한국적 감성에 잘 맞는 제목 <상실의 시대>는 모던(modern)하고 댄디(dandy)한 감성으로 무국(無國)적 도시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작가 자신이 요리와 재즈,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섬세하게 작용하여 작품의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은 영국 그룹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고 동시에 그가 이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신비하고 오묘한 노르웨이의 숲 속 이미지가 잘 살아 있다. 책이 출간될 당시 일본에서는 불륜소설이 한참 유행이었고, 이에 싫증을 느낀 젊은이들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갈 수 있는 순애문화(純愛文化)를 강조하고자 작가는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후에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1964~)같은 작가들이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로 그 계보를 잇게 된다.
<상실의 시대>는 198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반딧불>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단편 하나가 바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개똥벌레의 사랑>이라는 단편집으로 1988년 출간된 적이 있다. 그 후 하루키는 이를 더욱 확장시켜서 <상실의 시대>를 만들었고 세계적 베스트셀러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한국에서는 여러 출판사들이 다양한 번역가들의 손을 거쳐 번역본으로 소개되었으며, 하루키의 번역을 맡으면 유명세를 타기도 하는 등 파장 효과가 생기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하루키가 철저한 상업 작가라는 배척 시선도 있었으나 두 번씩이나 노벨문학상에 거론되는, 문학성을 갖춘 인기 작가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왕가위(王家衛,대표작 : <중경삼림>, <화양연화>,1958~) 감독의 작품 저변에서 '허무를 이겨내는 감수성의 주인공들'이라는 하루키 특유의 인물 군상과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다. 90년대 방송, 문학, 문화 전반에서 '하루키 신드롬'이 가히 폭발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한 시대를 이끈 하루키의 저력은 세계와 세월을 넘어서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소설 줄거리현재 37세의 '나' 와타나베 도오루는 업무 차 보잉 747기를 타고 독일의 함부르크 공항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공항에 울려 퍼지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1969년, 젊음의 짜릿한 공기와 슬픔으로 허우적거렸던 19살의 봄날을 회상한다.
고교 시절 끝 무렵에 '나'는 친한 친구인 기즈키의 자살을 겪게 된다. 그는 일말의 힌트도 없이 그의 여자 친구와 '나'를 세상에 남겨둔 채 자신의 집 차고에서 자동차 창문 틈을 테이프로 모두 막고 배기 가스관을 차 안으로 연결한 채 자살해 버렸다. 그의 자살은 '죽음이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경험이었고, 이로 인해서 '나'는 쓸쓸한 10대의 마지막을 보낸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자살한 친구의 애인이었던 나오코와 허망함의 동질 관계를 나누며 규정되지 못한 어색함으로 가끔씩 만난다. 애인의 죽음 이후 마음의 병을 앓던 나오코는 억지로 쥐어짜내듯이 생의 의지를 이어간다는 것이 '나'에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에 집으로 초대를 받던 그 밤에 측은히 울고 있던 그녀와 단 한 번의 육체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 후 나오코는 갑작스럽게 연락이 두절된다. '나'는 그녀에게 지극한 정신적 혼란을 준 것이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되어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4개월이 지난 후 나오코로 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해서 그녀가 요양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무렵, 학교 식당에서 마주친 미도리라는 활발한 여대생을 만나서 그녀의 소박한 서점이 딸린 집에 놀러가며 새로운 일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미도리의 가족사와 그녀의 생의 의지를 보며 그녀가 더욱 가까이 다가온 사람인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하지만 미도리와의 관계가 친밀해져 가고 있음에도 나오코의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산속 요양원으로 그녀를 찾아간 그 어느 일요일. 요양원에서 밝게 사는 듯이 보이는 나오코와 그녀의 룸메이트인 레이코 여사와 함께 요양소에서 며칠간을 보낸다. 한때는 촉망 받는 음악가의 길을 걷던 레이코 여사가 정신요양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오기까지 일을 들으며 감상에 젖는 '나'. 어느 누구에게나 일상에 존재하는 진흙탕의 흔들림을 깨닫게 된다.
드디어! 나오코는 애인의 상실 이후 반복되던 허무의 감정이 폭발해 버린다. 요양원 숲 속에는 그녀의 목매단 시체가 흔들릴 뿐... '나'는 도쿄로 돌아와서 짐가방을 챙기고는 몇 달간 정신없이 전국을 쏘다닌다. 고교시절 끝 무렵, 친구의 자살 이후 또다시 닥쳐온 나오코의 자살은 혼란스러운 감정과 멈출 수 없는 발걸음으로 사방을 헤매게 만들고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진다.
미도리! 그래, 그녀가 있었다! 도쿄로 돌아와서 기숙사를 떠나 집을 얻어 나온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방편으로 집 안팎을 손질하며 살아갈 용기를 내어보려 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때 레이코 여사가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요양원을 나와서 사회로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참이다. 서로의 상처를 달래던 그들은 불안과 쓸쓸함의 육체관계를 맺고 서로를 배웅한다. 그녀가 어디에서 살아가든 자신 있는 사람이길 바라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의 눈가에서 어린애 같은 눈물을 보자 그녀와 같은 심정으로 방향을 잃고 우울해진다.
이제 모두들 떠나가고 아무도 없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어떻든 그녀가 지금까지의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평정해 줄 것만 같다. 수화기 너머에서 미도리는 조용히 말한다.
"선배... 거기가 어디에요?" '나'는 공중전화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가 어디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가랑비가쏟아지는 혼돈의 세계에서 그저 수화기만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하루키 문학 수첩1949년 1월 12일 일본 교토부 교토시에서 출생한 그는 1968년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校)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하였다. 학원 분쟁으로 학교가 폐쇄되는 가운데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영화와 재즈 클럽에 드나들며 보냈다. 이후 1971년 결혼하고, 1975년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제22회 군조(郡像)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고쿠분지(國分寺)의 센다가야에서 재즈음악다방 '피터 캣'을 경영하며 낮에는 직접 음식과 음료를 만들고 밤에는 주방 탁자에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시절 그의 운치 있는 일과는 작품 속에서 간간히 배어나오기도 하는데, 각종 요리에 관심이 있는 주인공들과 고양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진 설정, 재즈바를 기점으로 젊음의 한 시절을 보내는 청춘들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하루키 약력 |
1982년 첫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제4회 노마(野間)문예신인상 수상 1984년 단편소설 <반딧불>, <헛간을 태우다>로 섬세한 젊음의 한때를 묘사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谷崎潤一郞賞)수상 1986년 <빵집 재습격>발표 1987년 정통 연애소설 <상실의 시대>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하루키 신드롬'을 낳았다. 1988년 <댄스 댄스 댄스>발표 1990년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외국 생활을 그린 여행에세이 <먼북소리> 1994년 수필 <슬픈외국어>, 장편 <태엽감는 새 연대기> 발표 1995년 인쇄매체 광고를 위해 광고문으로 쓴 <밤의 원숭이> 1996년 수필 <소용돌이 고양이의 발견법> 1997년 <렉싱턴의 유령> 2006년 <해변의 카프카>로 카프카상 수상 2009년 <I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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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소설은 물론 번역, 수필, 평론, 여행기 등 다양한 집필 활동을 통해 타 소설가와 차별되는 문학성을 이루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일본 문학에 대해 배우고, 집에 쌓여있는 외국문학 원서를 읽으면서 어학과 문학 실력을 키운 그의 남다른 문학 수업 과정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트란 안 홍에 의한 영화화 90년대 중 후반,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The Scent of Green Papaya, 1993)>를 통해서 섬세하고 유려한 시각과 청각의 영상을 선보였던 트란 안 홍(Tran Anh Hung. 베트남.1962~) 감독이 <상실의 시대>를 최근 영화화기로 결정하고 한참 촬영 중이다.
트란 안 홍은 그간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 외에도 <씨클로(Cyclo,1995)>, 최근 부산 영화제에서 개봉된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2008)>의 각본, 연출을 맡았던 베트남 출신 실력파 감독이며 그의 아내인 배우 트란 누 엔케(Tran Nu Yen Khe,베트남,1968~) 는 <그린 파파야 향기>를 촬영하며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