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아버지 찰옥수수 또 먹어볼 수 있을까?

등록 2009.12.26 10:03수정 2009.12.2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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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 배가 요즘 들어 자꾸 불어납니다. 임신부 배처럼 뚱뚱해진 아버지 배를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운동 많이 해야겠네. 배가 점점 뚱뚱해지잖아여~."

"어? 허허..."

 

아버지는 딸이 뭐라 하는 말에 그저 웃으십니다. 귀가 어두우니 제 표정만 보고 별 일 아닌 듯 그저 웃음으로 답하십니다.

 

십여년 전, 아버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동네 땅을 일일이 당신 손으로 일구었습니다. 여기 저기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땅에다 온갖 푸성귀며 고구마, 옥수수, 김장배추 등 해마다 아버지가 움직이는 대로 먹을거리들은 풍성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푸성귀를 거두고, 식구들이나 이웃과 나누는 재미에 밤이면 나른한 잠을 달게 주무셨습니다.여름무렵의 친정집은 찰옥수수가 지천이었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고구마 굽는 냄새가 구수했습니다. 김장은 아버지가 심은 배추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추나 고추, 파, 가지, 호박을 심어놓은 아버지 밭에 빨간 말뚝이 군데군데 박혔습니다. 동네에 도서관이 생긴다는 말이 언젠가부터 바람을 타고 들려오더니 그곳에 아버지 밭이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빨리 도서관이 생길까 싶었는데 굴착기가 밭 가운데 서 있고 난 다음부터 아버지는 한창 자라는 푸성귀들을 모두 거두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밭 일 많이 하느라 힘에 부치셨는데 차라리 잘 됐어요."

 

밭 일부가 없어져서 서운해하는 여든 여섯의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 연세도 있으시고 일을 줄여야 될 즈음에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위로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달려 굴착기가 움직이는 예전의 당신 밭을 지나 옥수수 밭에 자주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옥수수 알갱이가 들어찰 때쯤, 아버지 자전거는 바빠졌습니다.

 아버지 정성으로 알알이 박힌 옥수수. 한겨울에도 참 맛나게 먹었다.
아버지 정성으로 알알이 박힌 옥수수. 한겨울에도 참 맛나게 먹었다. 한미숙
아버지 정성으로 알알이 박힌 옥수수. 한겨울에도 참 맛나게 먹었다. ⓒ 한미숙

"옥수수 쪄놨는데 와서 먹어라."

 

친정엄마는 옥수를 찔 때마다 근처에 사는 우리식구들을 불렀습니다. 실컷 먹고 집에 갈 때는 언제나 옥수수 한보따리가 들려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키운 찰옥수수가 올해로 끝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도서관이 들어설 자리에 밭을 내주고 이번에는 지역에서 축제가 있는데 아버지 밭에 꽃을 심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뒷짐지고 걸어가시는 아버지. 사진의 옥수수 밭은 이제 없어졌다.
뒷짐지고 걸어가시는 아버지. 사진의 옥수수 밭은 이제 없어졌다.한미숙
뒷짐지고 걸어가시는 아버지. 사진의 옥수수 밭은 이제 없어졌다. ⓒ 한미숙
아버지 옥수수 따는 아버지.
아버지옥수수 따는 아버지. 한미숙
▲ 아버지 옥수수 따는 아버지. ⓒ 한미숙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딸. 한미숙
아버지와 딸. ⓒ 한미숙

 

 

밭을 뭉개기 전에 옥수수를 따러 가야지 하면서 날자를 벼르다가 아버지 밭에 갔습니다. 분명히 아버지 밭이 맞는데, 옥수수밭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따라 키작은 온갖 꽃들이 가지런히 심어놓은 곳, 아버지 밭은 어느 새 꽃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소일거리가 모두 없어진 아버지는 빈 자전거를 타고 당신이 날마다 오가던 밭을 둘러보는 게 일이었습니다. 요술방망이로 뚝딱 만들어지는 것 같은 도서관과 꽃밭이 된 아버지의 옥수수 밭. 도서관과 꽃밭을 보는 마음에 아버지의 주름패인 얼굴이 얼핏 스쳤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심은 고구마와 옥수수를 드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내년엔 그렇게나 맛나던 친정아버지 찰옥수수를 다시 먹어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2009.12.26 10:03ⓒ 2009 OhmyNews
#찰옥수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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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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