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평교사의 자존심을 짓밟지 마라

[주장] 서울시교육청의 '학교장 경영능력평가제' 발표를 접하고 나서

등록 2010.01.12 10:19수정 2010.01.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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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가 국회의 관련 법 논의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올 3월 교원평가제를 전면 시행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지난 10일 때 맞춰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장 경영능력 평가제'를 이달부터 즉시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넓게 보자면 이는 교과부가 강행하려는 교원평가제의 지역별 세부 기준안에 있어 첫 번째 모델인 셈이어서 주목된다. 교과부가 제시한 교원평가제 표준안에 따르면 학교장은 교원평가의 주체로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지만,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장이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중임 대상에서 배제해 퇴출되도록 덧붙인 것이다.

 

경영능력 평가는 총 다섯 등급으로 매겨지는데, 최상 3%의 S등급에서 A등급(27%), B등급(40%), C등급(27%), 그리고 최하 3%의 D등급까지 상대평가 방식으로 운영된다. 평가 항목은 학교 내 경영 성과와 학교장 활동 성과 등이 포함돼 있지만 계량화시키기 어려운 것이어서 대개 학부모 만족도와 학력 증진 성과로 판가름 날 공산이 크다.

 

올해부터 전국 단위 학업성취도 평가의 결과가 학교별로 공개될 예정이니, 학교마다 점수 올리기 경쟁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도 일제고사를 위한 모의고사가 치러질 것이고, 수업은 천편일률적인 문제 풀이로 진행될 것이 불 보듯 환하다.

 

학부모 만족도라는 것도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시험 결과에 따라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므로, 학교마다의 학사운영의 파행과 획일화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곧, 경영능력 평가를 앞둔 학교장들이 받아든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한 경쟁을 유도하고 틈틈이 보여주기식 전시성 행사를 자주 갖는 것, 그뿐이다.

 

이는 교과부가 학부모들 대다수의 찬성 여론을 등에 업은 채 막무가내로 강행하고 있는 교원평가제 계획 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측된 터라 그닥 놀랍지 않다. 그러나 평가 결과 인센티브 규정을 살펴보노라니 자존심에 상처 받는 걸 넘어 분노가 끓어올랐다.

 

최상 3% 내로 분류되면 포상금과 함께 각종 국내외 연수 혜택에다 전보 인사에서도 우대를 받게 되지만, 반대로 임기 내에 2회 이상 최하 3%에 속하게 되면 일선 학교가 아닌 교육청의 장학관이나 평교사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이는 사실상의 퇴출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의 발표가 나가자마자 주요 언론에서는 '무능한 교장은 평교사로 퇴출'된다며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관리직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평교사가 돼 수업 시간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두고, '퇴출'이라는 말을 버젓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땅 수많은 평교사의 자존심을 짓밟는 비수 같은 폭언에 다름 아니다.

 

교장·교감 등 관리직이 담당해야 할 행정 관리 업무와 평교사가 맡아야 할 수업과 학생 지도 업무가 엄연히 다른데도, 유능함과 무능함의 잣대로 구분하는 천박하고 왜곡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교육청의 설명대로라면, 학교장이 중임 대상에서 배제되면 평교사로 갈 수 있지만, 한때 교장이었던 사람이 어찌 수치스럽게 평교사로 내려가겠느냐는 거다.

 

학교장은 학교 내에서 평교사의 교육 활동을 지원하는 협력자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평교사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지배자임을 공식화시킨 셈이다. 과연 교장은 '유능'하고 평교사는 퇴출된 교장들을 포함해 '무능'한 집단일까.

 

흔히들 교사 집단은 둘로 양분된다고 한다. 교장이 되기 위해 승진에 목맨 교사들과, 승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교사들. 승진에 관심이 없는 교사라고 해서 모두 수업에 최선을 다하거나 아이들을 진정 위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승진에 목맨 교사들은 예외 없이 아이들은 뒷전인 채 수업과 별반 상관이 없는 점수 따기 경쟁에 '올인'한다.

 

더욱이 임용된 순간부터 평생을 평교사로 남아 아이들과 만나겠다고 선언한 교사들도 있고, 교육자로서의 귀감이 되는 교장 한 분 만나기 힘든 현실에서 아예 승진 체계 자체를 혐오하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학교마다 교장과 교감이 굳이 둘씩이나 필요한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외려 평교사를 한 명이라도 더 늘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교장과 교감이라는 '벼슬'을 앞세워 교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기를 북돋우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언제부턴가 교장과 교감이 평교사들의 존경을 받기는커녕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뒤돌아서서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하는 경우도 있다. '자리가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우스개가 떠도는 마당에 젊은 교사들일수록 이런 분위기는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아무리 욕을 먹어도 평교사로 정년퇴임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여전히 케케묵은 벼슬 관념을 지닌 경우도 더러 있긴 하다. 나중에 자녀 결혼식에서 사회자가 부모의 약력을 소개할 때 하객 앞에서 품위를 높일 수도 있고, 이러저러한 모임에 참석해서도 발언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못해도 명함에 '장'이라는 글자가 박혀야 방귀깨나 뀔 수 있다는 식이다.

 

0.1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온갖 잡무를 다 끌어오고, 근무 평정 잘 받기 위해 평가권자인 교장, 교감을 늘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데만 열중하는 교사는 단언컨대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없다. 학교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승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교사들이 교장·교감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봉급은 많이 받으면서도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이럴진대, 교장과 평교사라는 이름으로 교육자적 자질과 유능·무능을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요컨대 서울시교육청의 시각에서 보자면, 평생 수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난 평교사는 적어도 학교에서 가장 무능한 교사로 낙인찍히게 됐다. 이유야 어떻든 지긋한 나이라면 남들 앞에서 평교사임을 밝히기 곤란하게 될 것 같다.

 

교육청이 학교장의 경영능력을 평가한다는 데에 토를 달진 않겠다. 다만, 승진·포상 등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교육자로서의 소명만으로 묵묵히 한길을 걸어가려는 평교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말아 달라. 눈 초롱초롱한 아이들 앞에서 수업으로 말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평가 받으려는 평교사들의 바람을 비아냥대거나 왜곡시키지 말아 달라.

 

주변의 적지 않은 젊은 평교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정년은 국가가 아니라 아이들이 결정한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없는 체력과 마음가짐이라면 국가가 말려도 나간다. 아이들이 내 수업에 불만이 크고 그들을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교사를 그만두는 게 맞다"고. 이런 그들에게 학교장이라는 벼슬은 결코 '당근'이 될 수 없다.

 

아울러, 이번 일을 통해 이태 전 전교조가 내놓았던 '교장 선출 보직제'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게 됐다. 학교 내 구성원들 중에서 교장을 선출하고 임기를 마치면 다시 평교사로 돌아와 근무하는 조건과 환경이 서울시교육청에서 발표한 '학교장 경영능력 평가제'보다 훨씬 더 교육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10.01.12 10:19ⓒ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학교장 경영능력 평가제 #교원평가제 #근무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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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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