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너와 생일이 같은 이모가 있었단다

5개월여 전, 동생이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등록 2010.01.19 14:30수정 2010.01.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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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을 꾸다가 잠을 깹니다. 아직 주위는 어둡고 몇 시나 되었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때 부엌에서 엄마의 기침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의 기척을 들으면서 그래도 너무 이른 새벽은 아니구나 생각을 하며 불을 켭니다. 여섯시를 조금 넘긴 시각입니다.


엄마의 기침 소리가 연신 들려옵니다. 그 기침소리를 들으면서, 밥 같은 거 조금 대충 먹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기운이 거의 없는 부엌에서 새벽부터 아침밥을 준비하시는 엄마가 속상합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세워놓은 액자 속 사진 한 장을 바라봅니다. 조카의 돌잔치 때, 엄마와 조카, 그리고 동생과 제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조카의 두돌, 동생이 생각납니다

지난 목요일, 1월 14일은 조카의 만 두 돌이었습니다. 식구들끼리 언니 집에 모여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언니는 '어른 생일에는 안 모이는데, 애 생일에는 다 모이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24개월 된 조카는 그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기분이 좋아서 이리 저리 뛰어다닙니다. 어른들은 밥과 미역국을 먹고, 불고기도 먹고, 잡채도 먹습니다. 어른들은 생일 노래를 부르고 조카는 촛불 세 개를 끕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늦게 언니 집으로 온 사촌동생이 '희운이 생일이 이때쯤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마침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엄마는 조카 생일이 음력으로 12월 초하룻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조카 생일은 양력으로 1월 14일입니다.

저는 조카가 태어난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1월 14일이란 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나는 많이 슬픕니다. 800114. 80년 1월 14일. 동생의 주민등록상 생일입니다. 진짜 생일날이 아니기 때문에 엄마는 이 날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날을 기억합니다. '희운이랑 나랑 주민등록상 생일이 똑같네, 희운이 생일은 절대 못 잊겠다'라고 동생이 말했습니다. 동생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던 나는, 동생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결코 1월 14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24개월 된 조카가 내 가방을 열더니, 지갑을 꺼냅니다. 지갑을 열고 카드를 하나씩 꺼내봅니다. 그 지갑을 조카한테서 뺏어 카드를 하나하나 새로 챙겨 넣으면서 지갑에 넣어둔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사진속의 동생은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동생은 아마 조카의 생일날마다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희운이랑 나랑 주민등록상 생일이 똑같아"하고.

막내 이모가 조카에게 준 마지막 용돈

작년 1월 14일이 생각납니다. 조카의 돌잔치가 있던 날입니다. 그날도 날씨가 많이 추웠습니다. 아파서 제대로 먹지 못해 거의 누워 지냈던 동생이지만, 그날은 조카 돌잔치를 하러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동생 옆에는 다시 병이 재발한 동생 때문에 이래저래 많이 힘들었던 엄마가 있었고, 언제나 씩씩한 척했던 제가 있었습니다. 뷔페식당에 도착해서, 엄마와 조카와 동생과 저는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엄마는 조카를 안고 웃음을 짓고 있고, 동생과 저는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날 찍었던 그 사진이 지금 책상 위 액자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침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얼마 전 언니가 동생이 헌책방에 가져다 팔아 달라고 부탁했던 책들을 팔았다고 했습니다. 헌책방에서 만원밖에 못 주겠다고 했지만, 언니는 동생의 마지막 부탁이었음을 떠올리며 만원을 받고 꽤 많은 책을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원을 조카통장에다 입금했다고 했습니다. '막내이모가'라고 통장 내역 란에 적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동생이 조카에게 주는 마지막 용돈이겠지요.

동생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동생을 만나고 있습니다. 조카의 두 돌 되는 날, 1월 14일에 동생의 주민등록상 생일을 떠올리며 동생을 기억하고, 조카의 돌잔치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고, 동생의 부재를 떠올리고, 그리고 웁니다.

덧붙이는 글 | 동생은 4년 4개월의 암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8월 2일 늦은 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29년 8개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동생은 4년 4개월의 암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8월 2일 늦은 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29년 8개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습니다.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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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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