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7회)

죽은 자도 말한다 <4>

등록 2010.01.26 11:54수정 2010.01.2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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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희미하게 주억거리며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입장이었다. 오경하 현감은 여섯 달 남짓 의원을 만난 데 대한 소득을 들려주었다.

"나는 혼인한지 여러 해 됐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다 보니 집안이 훈훈해진다는 건 늘 바람이었네. 오의원을 세 번째 만나던 날, 그러니까 최 참판 댁 며느리 윤씨의 사건이 해결된 지 일곱 달 남짓 됐을 때 오의원이 내손을 잡고 진맥하더니 혀를 찼네"


"왜?"

"기가 부족해 아기씨가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야. 기녀들이 깔깔대며 웃어댔지만 그 자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네.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연민의 정이 넘쳤으니까."

정약용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래서 자넨 두 해가 넘도록 그 자의 처방을 받았고 술자리를  했네. 이것은 검안이나 공초에 쓰였던 게 아니라 그 자 집에서 발견된 뇌물장부에 있는 내용일세. 자네 외에 또 한 사람 있긴 하네만 그건 별개로 치고···, 그래 오의원에게 받은 처방은 효험있던가?"
"참으로 우스운 말이네만···."
"있었다는 말이군."

"집안에 아이가 없다보니 부인 보기 민망하고 잠자리에 들어도 서먹서먹해 지더란 말일세. 그러니 관아에서 공무를 핑계 삼아 날을 세우는 게 다반사였네. 그 자가 내게 '갱생환(更生丸)'이란 처방을 주어 대가 끊기는 건 면했네, 아하하하!"

오경하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그의 뇌리엔 오의원이 은근히 속삭인 말들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황실 처방이라 민간에선 사용하지 않습니다. 본래 이름은 '고양부갱생환(高陽負更生丸)'으로 황제왕조(黃帝王朝)의 여섯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인 백고 고양부(伯高 高陽負)가 내린 처방입니다."

이 처방은 기가 약한 사내들에게 일어나는 오로칠상(五勞七傷)이란 증세를 다스리는 비방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칠상의 증세에 일 년 사시절 먹을 수 있는 신약이 백복령(白茯笭)이며, 그걸 주재료로 사용한 게 '고양부 갱생환'입니다. 지금 사또의 몸은 여러 증세가 복합적으로 엉켜 있어 이걸 복용하는 게 좋습니다."

약재는 거의 스무 가지나 되었다. 이것들을 가루낸 후 꿀로 버무려 오동나무 열매크기로 만들어 흰 죽에 일주일을 복용하면 효과가 보이고 10일이면 오로칠상 증세가 치료되고 30일이면 정상적으로 기능이 회복돼 칠순 노인네도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처방법에 대한 설명을 마친 오경하는 그것을 복용하는 은밀한 방법에 대해 운을 뗐다.

"자네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아는가?"

"고려 선비들의 속작시(束作詩) 짓는 놀이가 아닌가. 초에 금을 긋고 초가 타들어가는 시간을 다투어 시를 짓는 방법이지. 그렇게 하여 장원자에겐 표창을 하고···."
"오의원은 각촉부시를 연상하는 희한한 처방법을 생각해 냈다네."

오경하도 경험해 본 터였기에 자신의 경우를 떠올려 풀어나갔다. '갱생환'을 처방해 복용하던 이레째 되는 날, 오의원은 황촉 한 자루를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가는 오경하에게 선물하며 잔잔한 미소를 눈가에 그려냈다.

"오늘밤은 사또께서 내당에 황촉을 밝힌 후 이각(二刻) 후에 들어가십시오. 그리하시면 내당 마님과 즐거운 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의원으로서 한 번 해본 소리라고 믿었는데 뜻밖의 결과였다. 항상 무덤덤하게 잠자리에서 돌아누웠던 것과는 달리 그 밤은 너무 뜨겁게 부인을 사랑했다. 명의(名醫)는 사람의 감정까지 다스릴 줄 안다고 들었는데 이날 밤의 일은 오의원의 솜씨가 일품임을 내심 감탄케 했다.

그 말을 들은 정약용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오의원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한 곳에 쏟아놓고 턱 끝을 감아쥐었다.

"흐음, 이제야 짐작이 가네. 여기 있는 물건들, 나비장식과 고리 모양, 십장생을 새겨 넣은 황촉은 모두 방사(房事)에 필요한 것들이네. 그러니까···, 세 해 전 천안으로 낙향한 정구수(鄭龜壽) 대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네. 송화가 그곳에서 돌아오면 원인이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검시기록을 작성한 천안 현감은 정대감의 죽음을 약물중독으로 단정지었네. 그 일에 오의원이 관련됐을 것이고 그로 인해 모든 걸 빼앗기고 용인 땅에 흘러들었을 것이네."

정약용은 흩어져 있는 황촉을 모두 반으로 쪼갰다. 한결같은 모양의 심지가 드러났으나 거북 문양의 황촉에서 나온 것은 색깔부터 달랐다. 황촉의 심지는 본래 한 가닥으로 주욱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것만은 유달리 7센티 남짓 이어졌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정약용은 확증을 다지고 있었다.

"십장생이 그려진 여러 모양의 황촉 가운데 유달리 거북 모양의 심지에만 매듭이 져 있고 푸른빛이 도는 건 향촉의 심지에 종류를 알 수 없는 약물이 묻어있다는 증걸세. 자네가 부인과 합방했던 그 날, 오의원이 황촉 한 자루를 주었다 했네. 그 황촉의 심지에 오의원만 알 수 있는 약물이 묻어 있었던 걸세."

오경하는 관아의 아랫것들을 오의원 집에 보내 타다 남은 황촉을 찾게 했으나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무릎을 치며 안타까워했지만 헛일이었다. 용인 관아의 포교 하나가 형식적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었지만 범인이 언제 들어와 그것을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의원의 주검 가까이 다가가 다시 살펴나갔다. 처음 오의원을 발견한 가노(家奴)는 서안 위에 얼굴을 처박은 주인을 보고 처음엔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알고 관아에 신고했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용인 관아의 수사관이 달려갔으나 오의원 몸엔 손을 대지 않았음을 볼 때, 가슴의 자상이 사인과 무관하다면 원인은 뭔가?

주검은 입과 눈이 닫혀 있다. 타살인 경우 당연히 입과 눈은 벌어져야 한다. 그게 편안한 죽음이다. 아무런 고통없이 죽일 수 있는 방법. 그게 뭘까? 문득 정약용의 뇌리에 떠오른 게 침(針)이었다. 서둘러 주검을 매만졌을 때 오의원의 배꼽은 부은 듯한 느낌이었다.

확대경을 들이대자 끈적이는 물체가 올라왔다. 일종의 밀랍(蜜蠟)이었다. 집게를 밀어 넣자 가느다란 철선(鐵線) 느낌이 전해져 천천히 뽑아보았다. 길이는 대략 5센티 가량이었다. 그날 정오가 가까워 송화가 도착해 천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풀어놓았다.

"정구수 대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건 약물 부작용이었습니다. 수찬 어른의 말씀대로 약재를 처방한 오의원은 중국황실에서 전해진 오석산(五石散)이란 비약을 만들었습니다만, 그게 잘못 돼 대감께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의원이 처벌을 받지 않은 건 평소 열이 많은 대감이 그 약재 외에 다른 강정식품을 먹고 절명했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언이라?"

"정대감의 첩실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오의원은 모든 재산을 첩실에게 빼앗겼다는 소문인데다 이후 오의원이 천안을 떠나 용인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헌데, 모를 일이 있다. 그토록 세도 높은 집안에서 대감의 절명을 알았다면 비약 처방을 문제 삼았을 일 아닌가. 어찌 첩실의 증언만으로 오의원을 풀어줬다는 게냐?"

송화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 댁엔 청상이 된 딸과 노모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 가계를 이을 아들을 보고자 첩실을 들였지만 그녀 역시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수찬 어른, 그곳 사람들에게 희한한 얘길 들었습니다. 오의원을 살리려 애쓴 사람은 첩실뿐만 아니라 청상이 된 딸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의 뇌리에 하나의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의원은 첩실에게 도움을 줬지만 청상이 된 딸과도 모종의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노마님은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편을 절명시킨 의원을 당장 참형에 처할 일이나 울며 매달리는 청상이 된 딸의 애절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딸의 뱃속에 든 아이의 아비를 형장의 이슬로 보낼 수 없는 거래였을 것이다.

상황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태석(吳泰石)이 용인 관아의 서리배에게 오석산 비방을 귀띔한 것은 그에게 던지는 미끼 겸 뇌물이었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약재의 효능을 믿지 못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처방에 매달린 것은 순간적으로 높은 효험을 보이는 약재의 폭발력 때문이었다. 역대 중국의 황제가 오석산 처방으로 조로(早老)하여 급사할 만큼 시든 남성을 되살리는 강력한 최음(催淫) 효과엔 그만한 물건이 없었다.

"나으리!"

헝클어진 머릿속을 달리던 생각들은 송화가 부르는 소리에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삼화루의 기생어미가 잡물을 보내왔습니다. 며칠 전 오의원이 놓고 간 것이랍니다."
보퉁이에 싼 물건은 부서진 쥘부채와 조각난 나비 장식으로 그곳을 다녀온 관원은 평소 오의원이 아끼던 물건이라고 말끝에 힘을 주었다.

"정향(丁香)이란 년에게 들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오의원이 죽기 전 삼화루에 들렸을 때 그년과 만리장성을 쌓았답니다. 욕심 많기로 소문난 년이니 제 품에 들어온 사내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요. 고년이 잠자리에서 향낭(香囊)을 달라고 보챘는데 그날따라 술에 만취한 오의원이 나비 모양의 장식을 줬답니다. 정향이 년은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이것을 벽에 집어 던졌는데 그걸 본 오의원이 몸에 지닌 쥘부채로 고년의 면상을 후려 갈겼다지 뭡니까. 지금 정향이 눈은 밤탱이가 돼 있습니다."

그 다음은 얘길 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오의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고 앵돌아진 정향이는 부서진 물건을 용인 관아로 들려보낸 것이다. 나비 장식을 정약용이 집어들었다. 한쪽이 떨어진 이음새 부분에서 무언가 흘러나왔다. 하얀 가루다.

'미약이야.'

정약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로부터 궁에 있는 여인들은 제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들었다. 비녀와는 달리 이 나비 장식은 중국 황실에서 제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후궁들이 머리에 꽂은 금보요(金步搖)였다. 여인이 걸을 때엔 나비의 날개같은 두 곳이 맞부딪쳐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 중의 하나지만 용도는 따로 있었던 셈이다. 금보요의 몸통을 돌리면 그 안에 든 가루약이 새어나왔다. 미약(媚藥)이었다.

기생 정향이에겐 더 없이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용도를 모르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던져버린 게 오의원의 분노를 산 것이다. 쥘부채도 마찬가지다. 정향이를 후려칠 때의 반동 때문으로 한쪽이 뭉텅 뜯겨져 나갔다.

산수화풍의 그림에 한 절의 싯귀가 있을 법 했는데 남아있는 건 '재천원작(在天願作)' 넉 자 뿐이었다. 부채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의 도서(圖署)는 '수(琇)'라는 붉은 낙인뿐이어서 서리배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도장은 눈에 무척 익습니다. 이런 도장 찍는 사람은 부아악(負兒岳) 암자의 수명(琇明)이란 비구닙니다. 왕가의 핏줄을 받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이며 행동이 뛰어났습니다만 환갑을 넘긴 지 오래 됐습니다. 지금껏 부아악에서 지낸 건 그곳 공덕암(功德菴)이 이승에서 몸을 눕힐 자리랍니다."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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