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새 핸드폰

당신은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등록 2010.01.30 17:45수정 2010.01.30 17:4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너무 예쁘다. 진달래 꽃 같네."

 

분홍 빛깔 새 핸드폰을 받아든 어머니의 얼굴에 분홍 빛 미소가 가득하다. 내 손엔 8년 전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실 때 사서 목에 걸어드린 흰색 구형 핸드폰이 들려 있다. 내겐 지난 8년 동안 멀리 계신 어머니의 현재 상태를 진찰하는 청진기이자, 어머니의 매일기도를 듣던 복음서 역할을 했던 중요한 물건이다. 어머니가 새 핸드폰을 어여쁘게 바라보시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헌 핸드폰을 눈물로 가슴에 안는다. 어머니와 나의 지난 8년 세월이 그 낡고 작은 물건에 담겨 있다.

 

서럽고 안타까운, 캄캄하면서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긴 터널을 우린 단 둘이 걸어왔다. 때론 너무 캄캄해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서로를 불렀던 목소리, 핸드폰은 천 리 밖에서도 어머니와 딸의 체온을 함께 데워 주었다.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신 지 8년! 어머니는 그곳에서 칠순을 맞으셨고 아주, 작아지셨다. 그리고 무남독녀 외딸은 사십 대가 끝났다.

 

너무 오래되어 충전이 잘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핸드폰을 새로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 가게에 들렀다. 서류를 적어 내려가는데 직원이 불쑥 말을 걸었다.

 

"약정 기간은 2년이에요. 그 안에 다른 일이 생기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시는 거 아시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순간 볼펜을 놓고 그 직원을 바라보았다.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직원이 빙그레 웃다가 다시 말했다.

 

"2년은 쓰시겠다고 약속하고 사시는 거란 말이에요."

"알아요. 안다구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거, 안단 말이에요."

 

거의 울음이 터져 나오는 듯한 내 목소리에 직원의 눈이 황망하게 커졌다. 그의 커진 눈동자에 나는 내 마음을 박아넣듯 다급하게 말했다.

 

"이 핸드폰, 저희 어머니가 쓰실 거예요. 약정기간 십 년짜리, 아니 이십 년짜리는 없나요? 저기요, 저희 어머니는 약속을 잘 지키는 분이거든요. 기도해주세요. 저희 어머니가 약정기간을 꼭 채우실 수 있도록요."

 

무슨 사연인지 뒤늦게 안 직원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는데 들릴 듯 말듯 한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도할게요."

 

한 사람의 기도를 덤으로 얻고 새 핸드폰을 사서 돌아오면서 나는 또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슴에 품었다.

'엄마는 약정기간을 다 채우실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위약금을 물게 하진 않으실 것이다. 약정은 약속이다.'

그날은 밤새 그 말만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핸드폰을 받으니 좋긴 한데 우리 딸 돈 쓰게 해서 어떡하냐? 조금만 더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루 종일 충전을 시켜도 자꾸 끊어지기만 하니..."

 

새 핸드폰을 줄에 꿰어 목에 건 어머니의 가슴에서 진달래 꽃 빛깔 핸드폰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달에 한 번 올 때마다 계속 새 핸드폰을 사다 드리면 약정기간 2년은 언제까지고 계속 유지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그렇게 어머니를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적금 보험 다 깨서라도 어머니의 서랍을 신종 핸드폰으로 가득 채워드릴 텐데.

 

어머니는 자꾸 작아지신다. 진달래 꽃잎처럼 자꾸 가벼워지신다. 그 작고 가벼워진 어머니의 몸을 바라보며 나는 약정기간의 무게로 어머니를 붙잡는다. 2년, 또 2년... 그러면 내 어머니는 약속을 지켜주실 것이다.

2010.01.30 17:45ⓒ 2010 OhmyNews
#어머니 #핸드폰 #약정기간 #기도 #요양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