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기업들 문 닫게 만들 땐 언제고...

퀄컴 회장의 벤처 투자 '선물'을 반길 수 없는 까닭

등록 2010.02.02 20:38수정 2010.02.0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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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한국을 방문해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 ⓒ 퀄컴코리아 제공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이 10개월 만에 한국을 찾았다. 1박 2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지난해 7월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정호열)에서 퀄컴에 2600억 원 과징금을 의결한 뒤 첫 방문이어서 국내외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예상대로 제이콥스 회장은 한국 내 R&D센터 설립 계획과 함께 국내 벤처기업 투자라는 '선물'을 안겼다. 하지만 1일 오전 기자회견에선 "퀄컴은 공정위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며 끝까지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그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퀄컴 400만 달러 벤처 투자 이면엔 '불공정 경쟁' 시비

퀄컴이 400만 달러(약 44억 원)를 직접 투자하기로 한 오디오 전문 반도체 기업 펄서스테크놀러지(대표 오종훈)는 순식간에 화제 기업으로 떠올랐다. 1999년 포항공대 교수인 오정훈 박사가 창업한 이 회사는 이미 전 세계 디지털앰프 프로세서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했을 정도로 '검증된' 업체였다.

투자를 주선한 KOTRA에 따르면 퀄컴은 펄서스테크놀러지가 2003년 최초로 개발한 휴대폰용 디지털증폭 시스템온칩(SoC) 기술과 현재 개발 중인 차세대 휴대폰을 위한 디지털오디오 규격에 관심을 나타냈다.

모든 국내 IT기업들이 퀄컴 회장을 반긴 건 아니다. 제이콥스 회장 방한 계획이 국내에 알려진 지난달 19일 국내 벤처기업 넥스트리밍(대표 임일택)과 씬멀티미디어(대표 데이비드 김)는 공정위에서 4년째 끌고 있는 퀄컴의 모바일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결합 판매에 대한 불공정 심사를 서둘러달라고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2006년 4월 두 회사는 퀄컴이 휴대폰에 들어가는 MSM 칩셋에 모바일 동영상 프로그램인 QTV 소프트웨어를 결합 판매하면서 경쟁사들의 시장 참여를 원천 봉쇄해 큰 피해를 봤다고 공정위에 신고했다. 두 달 뒤 외국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와 브로드컴도 퀄컴의 로열티 및 리베이트 정책 불공정 문제를 신고하면서 공정위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결국 3년 뒤인 지난해 7월 공정위는 국내 CDMA 모뎀 칩 독점적 사업자인 퀄컴의 로열티 차별, 조건부 리베이트 등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해 시정 명령을 하고 약 2600억 원의 과징금 부과를 의결했다. 이에 퀄컴은 부당하다며 즉각 반발하고 항소 계획을 강력하게 밝혀왔다.

다만 두 국내 기업이 제기한 건과 관련해서 공정위는 "휴대폰에서 동영상을 저장, 재생하는 모바일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경쟁자를 배제하는 혐의에 대해서는 추가 심사 중이며 판단이 완료되는 대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힌 뒤 지금껏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퀄컴 '끼워팔기'에 국내 모바일용 동영상 SW 업체들 고사

임일택 넥스트리밍 대표는 2일 오후 전화 통화에서 "로열티나 리베이트 문제와 달리 엔지니어가 아니면 용어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에 심사에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한다"면서도 "회의를 더 하더라도 올해는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넥스트리밍은 모바일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으로 2002년 설립한 뒤 삼성, 팬택, 모토로라, 소니에릭슨 등 휴대폰 모델 140여 종에 들어가는 동영상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왔다. 하지만 퀄컴이 모뎀 칩에 QTV 등 자체 동영상 소프트웨어를 끼워 팔면서 국내 시장을 포기하고 그동안 유럽, 중국 등 해외시장에 집중해 왔다. 

임 대표는 이번 건이 지난 2005년 12월 공정위가 'PC서버 및 PC 윈도와 미디어플레이어, 메신저 결합판매' 건으로 마이크로소프트에 과징금 330억 원을 부과한 것과 유사한 사안으로 보고 있다.

임 대표는 "퀄컴의 휴대폰용 칩셋 'MSM' 안에는 디지털신호처리(DSP)를 하는 'QDSP'가 들어가는데 그 사용법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 경쟁사들은 최적화된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없는 구조"라며 "결국 고객이 퀄컴이 직접 만든 QTV 소프트웨어를 살 수밖에 없게 만들어, 강제력은 없더라도 경쟁업체 진입을 막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넥스트리밍과 씬멀티미디어 정도를 제외한 관련 중소 업체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꿔야 했다.

그동안 CDMA 원천기술을 보유한 퀄컴은 국내 CDMA 모뎀 칩(PC의 CPU에 해당) 시장의 99.4%(2008년 기준)를 차지한 독점적 사업자였다. 때문에 삼성, LG 등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퀄컴에 많은 로열티를 지불해 왔다. 그나마 3세대 이동통신인 WCDMA로 넘어오면서 세계 시장에서 퀄컴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퀄컴 전체 매출의 35% 정도(2007년 기준)를 한국 시장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2월 1일 오후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찾아 면담한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은 한국 내 유망 IT벤처 투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 방송통신위 제공


"독점적 사업자 투자는 큰 의미 없어... 개방 정책으로 바꿔야"

때문에 이번에 퀄컴이 모처럼 한국 시장 투자계획을 밝혔지만 국내 언론이나 IT 업계의 시큰둥하다. 구체적 실행 계획은 빠져 있고 공정위 과징금 부담을 덜려는 생색내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누가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투자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게 결국 퀄컴이 그 과실을 다 가져가는 투자를 할 수도 있거든요. 국내 R&D센터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더라도 그 지적재산권(IPR)을 퀄컴이 독점하고 이를 또 (국내 업체에) 묶어서 판다면 재주만 곰이 넘는 거나 다를 게 없죠."

결국 독점적 사업자인 퀄컴의 정책 자체가 오픈 소스처럼 개방 정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번 투자 계획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다변화된 구도가 돼야 가치를 창조할 수 있지, 독점적 회사가 끌고 가면 이노베이션(혁신)이 안 생겨요. (퀄컴이) 단기적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퀄컴 #넥스트리밍 #폴 제이콥스 #휴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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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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