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회)

나비의 독 <1>

등록 2010.02.05 09:57수정 2010.02.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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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차자(箚子)가 한양으로 내달았다. 상감께 올리는 정약용의 간이상소문이다.

<···전하, 홍문관 수찬 정약용 돈수백배하여 아뢰나이다. 용인 땅 최 참판 댁 며느리의 자액(自縊) 사건은 오태석 의원이 저지른 흉측한 살인사건으로 밝혀졌나이다. 전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조사하던 중 사건의 뼛속엔 선대왕 시절 형조(刑曹) 관리였던 정구수 대감의 잔재가 남아있었나이다. 선대왕의 치정(治政)이 바르게 미치지 못함을 이유로 허리가 곧은 위인들이 편당을 지어 큰소리를 내고 중앙요로에 줄을 대 불급한 일을 추진하려던 것이라 보옵니다. 신은 오의원에게 원한이 깊은 최 참판 댁 장손 최석원의 술책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나이다. 이전의 허물을 뼛속 깊이 새겨 신은 최석원의 생사를 추적하는 한편 이의원의 뇌물장부에 드러난 성주관아(星州官衙)를 탐문해 볼까 하나이다.>


세상을 떠난 정구수 대감이 중앙요로에 줄을 대 최석원을 진출시키겠다는 큰소린 향긋한 뇌물을 삼키려는 허드렛말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이의원 처소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도 그러했지만 정약용의 시선을 끈 것은 <사아(蛇牙)>라는 서책이었다. 본래의 뜻대로라면 '뱀의 어금니'가 맞는 말이지만 그와 상관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한의학의 재료로 사용되는 게 뱀 껍질 사탈(蛇脫)이 있었지만 기름종이로 겉표지를 싼 서책 내용으로 볼 때 '사아'란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다른 뜻으로 가능성 있는 말은 뇌물장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인현감 오경하에게 건넨 오석산(五石散)이란 약재의 명칭이 그곳에 적혀있는 걸 보면 자신만이 알 수 있도록 그런 단어를 쓴 것으로 보였다.

장부엔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전했는지가 쓰여 있어 한결 정약용의 추정이 바른 것임을 뒷받침했다. 바로 이 뇌물 장부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성주감영이란 명칭 아래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한 마리 나비라. 날짜 별로 쓰여 있는 걸 보면 성주에서 사람이 온 게 몇 달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흐트러진 생각 때문에 다음 목적지를 성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조정에선 선대왕 때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낸 전치욱(全治旭)의 아들에게 관찰사를 내려 성주감영에 도임시키고 있었다. 과시를 통하지 않고 부친이 조정에 끼친 업적을 평가받아 문음(門蔭)으로 내린 공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다섯 해 만에 성주(星州) 감영 관찰사로 부임한 전성국(全盛國)의 금의환향은 멀리 함창 지방까지 뻑적지근하게 울릴 정도로 대단한 경사였다. 공검지(公儉池) 금잉어가 잔칫상에 오르고, 철 지난 성주 명물 개구리참외가 떠억 하니 모습을 드러낸 것만 보아도 전성국의 금의환향은 고을 안팎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점은 전임 형조정랑을 지낸 부친의 음덕이 자리 잡은 탓에 여기저기서 보내온 선물이 곳간 한 개는 채우고도 남을 정도여서 고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환영연이 열리고 '초승달 춤'의 달인이라는 성주 기생 추월(秋月)이의 춤사위가 좌중을 한껏 들뜨게 만들자 눈치 빠른 고을 유지가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아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늘밤은 추월이 차질세. 관찰사 어른은 혼인한 지 고작 여섯 달이니 뜨거운 피를 어찌 주체할 것인가. 부인께선 오는 길에 여각(旅閣)에서 배탈이 나 늦는다 했으니 오늘밤은 추월이가 모셔야겠다!"

어지간히 깊어진 술판이 막을 내린 후에도 숙소로 돌아온 전성국은 조촐한 주안상을 펼치고 설익은 염담(艶談)의 끈을 풀었다.

"아하하하, 기생이란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게 본색이 아니냐. 그리하자면 창(唱)을 잘하거나 춤을 잘 춰야 하고 이불을 깔면 요본감창(凹本甘唱)에 일가견이 있어야지. 그래, 넌 뭣에 자신 있느냐?"

"쇤네는, 사내 마음을 낚는 춤을 추옵니다."

"사내 마음을 낚는 춤이라? 허면, 관산지월(關山之月)을 아느냐?"
"그건 이백(李白)의 풍류시지요."
"오호! 성주 변방에 있는 네가 그것을 안다?"
자리에서 일어난 추월이는 대답 대신 쥘부채 펼쳐들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이 천산에서 나오니
첩첩한 구름바다로다
수만리를 불어온 바람이
옥문관(玉門關)을 휘어감누나

한(漢)은 백등(白登)의 길로 내려오고
호(胡)는 청해(靑海)에서 엿보나니
무릇 싸우는 땅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구나

수객(戍客)은 변경을 지키며
어두운 얼굴로 돌아갈 날 생각 하고
높은 누각에선 이 밤도
한숨소리가 그치지 않누나

풍류시로 통하는 이백의 관산지월을 노래하며 추월이가 춤을 추자 전성국은 손뼉을 치며 즐겁게 화답했다.

"아하하하, 내 오늘 풍류를 아는 정인을 만났구나!"

전성국이 호쾌하게 추켜세운 관산지월(關山之月)은 당시의 묵자(墨子)들에게 은근히 깔려들고 있었다. 이 시엔 여러 부분이 은유적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옥문관(玉門關)은 사내 공격에 자지러지는 여인네의 감춰진 곳이고, 언덕(關山)과 하늘에 걸린 달은 위에 붙은 젖가슴을 은유한다. 그런가하면 남자와 여자를 구름과 비, 바람과 달, 꽃과 이슬로 노래한다.

어디 그뿐인가. 한(漢)은 남편이며 호(胡)는 샛서방이다. 그럼 수객(戍客)은 무언가, 이른바 국경수비대다. 남편이든 샛서방이든 빨리 물러가라는 건 또 하나의 사이서방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은유로 이루어진 시가를 알고 있단 점에서 전성국의 마음은 추월이의 깊은 곳으로 이미 빠져들고 있었다.

날이 밝자 감영이 발칵 뒤집혔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신임 관찰사는 일어나지 않았고 함께 잠자리에 든 추월이도 기척이 없자 권속들은 자연 조바심이 났다. 형방(刑房)이 내실 협문을 밀치고 살그머니 낯을 들이밀더니 질겁해 비명을 질렀다.

"사, 사, 사또께서···, 변을··· 당했소!"

서른이 약간 넘은 형방은 부들부들 떨며 넉장을 쳤다. 얼마나 놀랐던지 바짓가랑이엔 흥건히 오줌줄기가 배어나왔다. 즉시 상부에 보고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 수습에 나섰다.
감영 사고에 대한 초검의 검시기록은 형방의 몫이다. 그는 포교 하나를 꽁지에 달고 하루가 다 가도록 검시기록을 작성하더니 오후 늦게야 일을 마치고 막걸리 사발을 들이켰다. 길을 안내하는 항인(行人)이 물었다.

"형방 어른, 관찰사 어른은 어찌 되셨습니까?"
"귀신에 홀려 죽었네. 함께 있던 계집도 조금 전에야 깨어나 아는 바 없다고 넋 떨어진 소리뿐이니. 귀신의 솜씨가 아니면 어찌 그런 일이 생기겠는가. 내가 사또의 몸을 살폈네만 이렇다 할 상처가 없으니 분명 귀신에 홀린 것이야."

다음날 오후 늦게 도착한 정약용은 형방이 작성한 검시기록을 살핀 후 주검을 눈여겨보았다. 나이가 서른하나니 혈기 방장할 때다. 하루 반의 시간이 지났지만 주검은 잠을 자듯 평온했다. 사건이 나던 날 참석자를 위주로 송화가 귀동냥 하는 동안 정약용은 형방을 앞세우고 조사에 들어갔다.

"관찰사가 귀신에 홀려 죽었다는 검시기록인데 그리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오?"
"외상이나 내상이 없고 무엇에 놀란 듯하여 그리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적어놓으면 장차 이런 일에 전문가가 왔을 때 작으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축하연을 연 탓에 술과 음식을 포식한 게 원인이라 보진 않았는가?"
"아무리 미련하기로 자신이 죽을 만큼 먹겠습니까."

"아닐세. 다섯 말 술을 지고 가진 못해도 마시고 간다는 말이 있네. 술을 마실 때엔 잘 모르나 과도하게 먹으면 심폐(心肺)가 팽만해 치사하기 십상이네. 이런 자들은 배를 두드리면 뱃가죽이 팽창하여 소리가 나네."

"그런 경운 어찌 해야 합니까?"
"술자리에 있던 여러 증인을 부른 후 오작과 항인으로 하여금 초(醋)와 끓인 물(湯水)로 시체를 씻은 후  검사하네. 손상된 흔적이 없으면 술과 음식을 과도하게 먹은 원인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네."

"관찰사 어른의 죽음도 그런 것입니까?"
"살펴보면 알 일이네."

그때 동헌 마당에 열일곱 남짓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은 겁먹은 얼굴로 내당 소식을 전했다.

"저기,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님께서 판관 나으리를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형방이 조심스럽게 뒤를 받았다.
"세상을 떠난 관찰사 어른의 부인이십니다. 한 시각 전에 당도해 비보(悲報)를 들으셨습니다. 부인께서 찾으시니 일단 가보시죠."

중문을 지나니 뒤뜰이 나오고 그곳은 동헌과 이어진 뒤채였다. 툇마루에 오르자 발이 쳐진 안쪽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외람되게 어른 청함을 용서하십시오. 다름 아니라 바깥어른을 따라 이곳으로 오던 중 우연히 주막거리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진통이 심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데 그곳을 지나던 점쟁이 노인이 내게 글자 한 자를 쓰라지 뭐겠습니까. 때마침 <여논어(女論語)>를 읽던 참이라 '차(此)' 자를 말했답니다. 노인께선 '병은 은밀한 곳에 생겼으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깊어 졌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 수치일 것입니다. 부인께서 쓰신 차(此)에는 뱀의 독 이빨(匕)이 두 개나 있어 등사(螣蛇)가 몸을 친친 감은 것으로 보이고, 호랑이(虎) 꼬리를 닮은(儿) 부분이 있으니 질병이 더욱 깊어지겠습니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바깥양반의 신상에 이상이 있지 않을까 하여 달려 왔는데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동헌으로 돌아온 정약용을 기다린 건 성주 감영에 지겟다리 걸치고 죽은 자의 관(棺)을 짜는 점박이 노인이었다. 태생이 천박한 것은 그렇다 치고 헐헐헐 웃어대는 웃음찌꺼기가 여간 비릿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점박이 노인은 다짜고짜 전성국의 전력이라는 걸 끄집어내 먼지가 떨어지도록 팔랑거렸다.

"죽은 관찰사의 치수를 재다 보니 상판대기가 낯익어 뜯어봤지 않습니까. 이 작자는 형조정랑을 지낸 애비 덕분으로 벼슬길에 나간 왈패가 분명합니다."
왼쪽 이마에 큼지막한 점이 박힌 노인은 묻지도 않은 옛 사연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주]
∎문음(門蔭) ; 조선시대에 조상의 공덕으로 그 후손의 신분을  우대하기 위해 친족이나 처족의 음공에 따라 내리는 벼슬. 고려 때엔 음사(蔭仕)라 했다.
∎관산지월(關山之月) ; 이백(李白)의 풍류시. 여기에 초승달 춤을 덧붙이면 사내의 마음을 낚는 춤으로 변한다.
#추리, 추적, 정약용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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