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존엄한 가난을"

망명대통령 아리스티드 아이티 전 대통령의 <가난한 휴머니즘>

등록 2010.02.07 10:01수정 2010.02.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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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2007 이후 출판사 ⓒ 이상미

카리브 해를 사이에 두고 미국 가까이에 있는 아이티란 작은 나라가 이번 지진 피해를 통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 대상으로 오르내리고 있지요(놓친 드라마 줄거리 확인하는 데만 관심을 보였던 저는 조금 늦게 아이티 지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진 이후 치안 불능 상태가 되어 거리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식량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모습, 사망자 실태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한 아이티 사람들에게서 절망을 마주한 사람의 모습이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티 재건을 위한 성금을 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후원금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지진 피해를 딛고 일어날 수 있게 구호물자와 돈을 보내는 것이 현재 아이티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겠지요. 다만 경제적인 구호 활동을 통해 아이티의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 인터넷 서점의 소개 글을 통해 알게 된 한 권의 책에서  제기된 이 질문은, 제게 아이티의 정치 현실을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제 원조를 받아 예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활 터전을 재건할 수는 있겠지만, 생존자들이 겪어야 할 현실은 지진 이전의 열악한 정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미국이 구호 인력이 아닌 군인을 파병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휴머니즘>(2007, 이후)은 현재 미국의 아이티 내정 간섭으로 축출되어 망명 중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아이티 대통령이, 자신의 조국 아이티에 보내는 아홉 통의 편지 글을 모은 책입니다. 아리스티드는 이 책을 통해 아이티가 처한 정치, 역사,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련한 내용을 간명하게 담아내면서 아이티가 스스로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길에 대해 고민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읽는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도 그 고민을 함께 해주길 호소하면서 말입니다. 이 부분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와 동떨어진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 그 괴물 같은 체제 속에서 살아가기

"지구적 자본주의는 우리 행성을 집어 삼키는 기계입니다…단지 싸구려 노동력으로 취급받으면서, 누구라도 쓰고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기계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측정할 수도 없고, 측정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 기계는 우리 행성의 고통도 측정하지 않습니다."


아리스티드가 지적하는 아이티의 상황, 더 나아가 지구촌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거대한 자본주의는 가난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착취구조를 심화시키며, 심지어 선진국이 후진국에서 경제적 원조를 하는 것도 결국 자신들의 경제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요(돈을 지원해줄 테니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정책을 통과시키라는 압력 등등 방법은 여러 가지 입니다).

아리스티드는 가난한 사람들이 전 지구를 휩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복속되어도, 그 체제를 거부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의 수는 매우 제한되어 있고, 체제가 약속하는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한 경쟁에 돌입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가 해줄 수 있는 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굳이 보상을 안 해줘도 체제는 알아서 잘 돌아가거든요).

아리스티드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아리스티드 재단',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는 단체인 '라팡미 셀라비'를 만들어 자본주의 방식이 아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궤도를 수정할 약간의 여지와 생존만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찾아내기 위해, 아이티 사람들은 아리스티드의 활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비록 그 열정과 노력이 미국과 쿠데타 세력을 통해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순간의 맑은 하늘을 기억하며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 투쟁합니다.

"왜 너는 '기브 미 워터'라고 하지 않니?"
"누가 내가 목마르다고 하던가요?"

예전에 레스타벡(중산층 이상 아이티 가정에서 무급 식모로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던 베르토니라는 아이는 "기브 미 워터"를 반복해서 가르치는 미국인에게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대답합니다. 아이티에게 불리한 경제 협정을 제안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을 향해 아리스티드가 내세우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는 선진국이 내뻗는 도움의 손길은 자선행위가 아닌 사업임을 간파하지요. 세계가 그들에게 물을 주려고 할 때 초콜릿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주겠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베르토니가 말한 것처럼 아이티가 필요한 바를 능동적으로 요구해야만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티의 가난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국제기구의 지시만을 따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응한다면 부를 이루기는커녕 생존을 담보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아리스티드는 '존엄한 가난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합니다. 망명 중인 전직 대통령의 마음속에는 민주주의와 인간다움을 위해 투쟁하는 시민 공동체를 통해 존엄한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제3의 길'에 대한 신념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갈고 닦은 사상은 예리합니다. 농민들의 예리한 사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해방의 불빛이 밝게 타오르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일단 한번 깨어나면 다시는 잠들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소금 맛을 본 이상, 그 누구도 다시는 스스로 노예가 될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리스티드는 '저렇게 적게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아무런 길이 없는 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를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아이티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동참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진흙쿠키를 구워 먹고 살면서 지진까지 일어난 나라에서 어떻게 희망을 일궈낼지 회의할지 모르죠.

조국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아이티인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한 정치인의 편지를 읽으며 미약한 힘일지라도 스스로 삶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가 얼마나 멋진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세계의 흐름을 바꿔나가기 위해, 제3의 길인 희망을 위해,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아이티의 고통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직시하고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예전에 아이티인과 아리스티드가 희망의 연대를 만들어냈듯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삶을 바꿀 수 있는 긍정의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존엄해질 수 있다는, 미약하지만 빛나는 꿈을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아이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통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거든요.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 2007


#아이티 #가난한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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