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구읍 시인 정지용의 생가에 다녀와서

옥천구읍에 가면 아름다운 시들이 춤을 춘다

등록 2010.02.11 10:16수정 2010.02.1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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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목회에서 은퇴하여 대전에 사시는 목사님께 인사를 드릴 겸 훈이와 순이 얼굴을 보기 위하여 옥천으로 내달렸다. 아직 완전한 봄을 기대하기는 이르지만 구름에 덮인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고, 금강줄기에서 올라온 안개가 산허리를 휘돌아 성큼 다가온 봄을 느끼는 이런 날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옥천에 정지용 시인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심하게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어 시간을 내보기로 하였다.


옥천톨게이트를 나와 좌회전하여 얼마 가지 않으니 구읍(舊邑)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이 옥천 옛날 읍으로 660년 동안 옥천군 중심지였다. 대전에서 옥천군 이원면, 영동읍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철길이 구읍으로 지나도록 설계되었는데, 기차역에 세워지면 동리가 시끄럽다고 외각으로 몰아낸 양반들 고집으로 1905년 경부선 철도역이 십리쯤 되는 남쪽에 세워져 그곳이 도시 중심지가 되었다. 구읍은 역사의 맥을 잘못 짚어 옛날의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작은 동리로 쇠락해가는 모습이다. 1960년대만 해도 옥천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살았는데, 대전과 청주, 그리고 서울에 자손과 친척들을 나누어 주고, 지금은 반으로 준 형편이다. 새로운 시대에 기선을 제압당한 이 동리는 젊음을 다 잃은 노파처럼 초라하기 그지 없다.

'넓은 별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흐르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 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구읍 북쪽은 마성산이고, 보은으로 이어지는 37번국도 건너 깃대봉 아래에는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다. 터가 좋아 위인이 탄생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새로 건축되는 여사 생가 옆 잘 꾸며진 넓은 정원을 가진 집들에는 검고 큰 자동차들이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저먼 세퍼트 도그 마냥 험상궂은 모습으로 입구에 도사리고 있어 타인의 근접을 허락지 않을 듯하고, 철망으로 이웃과 단절한 채 조금은 거만한 모습으로 비에 젖어 음침하게 서있다.

구읍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사거리 우편취급소 어르신과 대화를 나눴다. 마성산에서 내려다 본 죽향, 교동, 동안, 문정, 상계, 하계, 여섯 마을로 이뤄진 구읍은 마치 새가 새*끼를 품은 형상인 평화로운 동리로 옛날 어른들 말씀은 이 동리를 떠나 서울이나 큰 도시로 나간 사람들은 성공하였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단다. 새는 어미 품을 떠나야 높이 날지만 어미 품에 머무르고 있으면 날지 못하여 출세를 못한다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구읍 출신으로 근대 역사적인 인물로 1899년에 출생하여 5.16 주도세력이며, 민주공화당 초대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용씨와 1902년 하계리 약국집 아들로 출생한 정지용 시인, 그리고 1925년 11월 29일 교동리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를 들 수 있다. 마성산 아래 이마를 맞댄 여섯 마을에는 정지용 시인의 표현대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은 지금도 흐르지만,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울음을 울던 곳'에서 나온 것처럼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데려다 줄 주인을 기다리던 황소 울음소리는 이제 그치고 말았다.


우리가 어릴 때 정지용 시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살았던 것은 사상 문제 때문이다. 해방 후 이화여전 교수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다. 적극 활동하지는 않았고 곧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고는 하지만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됐다. 이광수 등 33인이 유엔군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계광순이 증언하나 확실하진 않다.

또 다른 이야기로 1950년 가을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숨졌다는 증언 자료가 공개되기도 했는데, 박태상 한국방송대 교수는 2002년 5월 17일, 충북옥천에서 열리는 세미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북한 시인 박산운의 회고문 '시인 정지용에 대한 생각'에서 박산운은 '1992년 여름 북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셋째 아들 정구인씨와 함께 소설가 석인해의 집을 찾아가 정지용이 1950년 가을에 사망한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힌다. 석인해는 '그 해 9월 21일 아침 남쪽에서 문화공작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동두천에서 정지용을 만났다'며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동두천 뒷산을 넘었는데 산 이름이 소요산이었으며, 태백산 줄기를 타는 동쪽으로 길을 잡고 정지용과 함께 오고 있었는데 불시에 미국 놈들의 비행기가 날아와 기수를 숙이더니 로켓포탄을 쏘고 기총소사를 가해 비행기가 사라진 뒤 정지용을 찾아보니 가슴에 총을 맞고 이미 숨져있었다'고 말했다며, 이후 정구인씨도 1995년 6월 통일신보에 '아버지가 북으로 오던 중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기슭에서 비행기의 기총 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정지용 시인은 1947년 10월 조선천재시인이라 불렸으며 자진 월북한 임화가 1945년 12월 3일에 조직한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했다. 해주에서 활동하던 그가 6.25가 터지자 서울로 다시 내려와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여 부위원장을 역임했을 때 정지용 시인은 남으로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함께 활동했거나 임화의 행적에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그의 18살 된 셋째 아들이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위하여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시인이 자진 월북했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한 세대를 월북자로 지내왔던 것이다. 시인이 자진이나 반 강제적으로 월북했던지 납북되었던지, 어떤 연유라 하여도 시대의 아픔에 피해를 입은 지식인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그가 자진 월북했는지 강제로 납북되었는지 아직까지 불분명하지만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3월이 돼서야 그와 그의 작품이 해금되어 그의 이름과 시가 세상에 알려지고 교과서에도 등재가 되었고,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그의 대표적인 시 '향수'를 대중가요로 부른 후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 나도 그 때서야 정지용 시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자식 5남매와 아내를 버려두고 만주로 떠나 고아처럼 살아온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눈으로 목격한 나는 '향수'를 접할 때마다 정지용 시인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어떤 남편과 아버지였을까 궁금하였다. 그 이유는 학문과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상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버린 못된 아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이 구절에서 12살에 결혼하고 17살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일 년에 몇 차례 방학에 재회하여 사랑을 나눴을 듯 한 그의 삶이 그려지고, '향수'를 발표한 22살에 교토로 유학을 떠났으니, 그때 농촌에서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일을 하던 그의 아내의 굵은 손마디와 군살 박힌 발뒷금치가 그려지고, 서울에서 헉헉대며 달려오던 기차굴뚝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를 보며, 가족의 부양을 맡기고 서울로 떠난 임을 원망하기도 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힘든 삶을 감내하며 살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의 아내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하다. 시인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처럼 첩을 두거나 다른 여인과 동거했다는 기록을 찾지 못하고, 1928년 28세에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9월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며 부인과 장남을 데려와 종로구 효자동에 자리 잡은 기록을 보면 유학을 다년 온 후 친구 같기도 하고, 정 깊은 누나 같기도 한 아내와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가정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을 그립어'

서울과 교토의 하늘도 푸르기는 했겠지만 아내가 있는 고향의 하늘만큼 아름다웠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하늘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시인 눈동자는 파아란 하늘만큼 깊고 깊었으리라.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이라는 위의 시처럼 유년시절 자랐던 옥천구읍의 지금은 그때처럼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못하다. 넉넉하게 회돌아 나가던 실개천은 시멘트 둑으로 막혀 동구 밖으로 급하게 내달리고, 얼룩배기 황소가 등굽은 노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좁고 푸르던 길들은 검은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하얀 선으로 화장하여 상큼하지도 정겹지도 못하다. 군(郡)에서 만들어 놓은 그의 생가는 약방을 했을 집으로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고, 어디나 볼 수 있는 여러 위인들 생가와 다름없다. 젊은 모습의 시인의 사진과 약장, 반닫이, 질화로가 안방을 지키고, 뜰과 담 너머에는 장독대와 물레방아를 세워놓은 실개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구읍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새로 조성되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와 사마소,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 그리고 골목과 개천, 죽향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시인이 살던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1910년, 9살부터 1914년까지 다녔던 죽향초등학교에는 '해바라기씨'라는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밤 자고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자고가고,
해바라기는 첫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꽥!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옆에 숨은
청개구리 고놈이다.

학교 후배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기 이틀 전 1974년 8월 13일, 친필로 기록했다는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다.

나를 다시 궁금하게 했던 것은 정지용 시인의 종교였는데, 그가 다닌 휘문보고는 민영휘가 1906년 세운 학교이며, 그는 단군교에 포섭된 친일파로 그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오기선 신부가 '정지용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기독교를 받아 드렸다'고 증언한 것을 보면 조국을 떠나면서 허전하고 두려운 마음을 달래고자 기독교에 귀의하였지만 신앙심이 깊지 못하여 같은 학교 유학생이며 누님처럼 따랐던 한국개신교 최초 장로가 된 김말봉에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라는 책망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 이유로는 이태규가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이탈한 이단으로 천주교로 개종'하기를 권고하여 1928년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프란스코라는 세레명을 받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으로 세워진 동지사대학을 다니면서 천주교로 개종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슬바람.
앞 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죵죵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거리.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멋은 듯
새삼 듣는 빗날,
붉은 닢 닢
소란히 밝고 간다.

구읍을 떠나는 발걸음에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쓴 '비'라는 시인의 마음을 담아본다.

옥천 애양원에서 훈이를 만나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학교에 간 순이를 데리고 중국집에서 간자장과 탕수육을 먹었다. 이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폭력으로 엄마는 가출하고, 영실애육원에 생활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이곳을 자기 집이라고 불러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훈이와 1학년인 순이가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여 인연을 맺었는데, 방학이면 교회에 와서 며칠 지내다 가기도 하고, 졸업식에는 우리가 옥천에 와서 축하를 해주었는데, 올해는 훈이가 고등학교 졸업반인데도 연락이 없어 찾아와 본 것이다. 훈이는 또래 아이들 보다 키가 작은 편이며, 이달 28일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애육원에서 나가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친구와 방을 얻어 나간다고 한다. 연순이는 예쁘게 잘 자랐다. 이제 중학교 2학년이니 그곳에서 더 생활해야 하고, 고등학교는 실업계에 가서 공부하여 취직을 하겠단다.

"순아! 남자친구 사귀지 말고, 교회 열심히 다녀! 그리고 부탁할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순이에게 옷을 사 입으라고 십만 원을 내밀고 대전으로 향하였다.

반가워하시는 목사님은 몸이 야위고 외로운 모습이다. 10년 전에 위암 수술을 하셨는데 올해 10월에 재발하여 남아 있는 위를 거의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우리에게는 연락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깨끗하고 넓은 아파트에서 외손녀를 재롱에 행복해하신다.

식사도 잘 못하시는 목사님에게 굴밥을 얻어먹고 청주로 향하는 발길에 굵어진 빗줄기가 가로막아 선다.

옥천구읍
                                                       최천호
옥천구읍에 가면
미려한 언어들이 시가 되어 춤을 춘다.
화려하지 않은 금 빛 저녁 햇살이
가슴을 열어 물들이면
파아란 하늘은 금시
눈물을 떨어트릴 듯 울고 서서
그리운 어머니께 달려가려 한다.

밤새 울던 부엉이 잠이 들 즈음
하얀 연기 피어올라 아침을 알리고
고개 숙인 초가지붕 뒤편
실개천의 송사리 살이 오를 때
목이 긴 백로 짝을 찾아 날고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소녀와
종아리가 통통한 사내아이들이
물 장난치며 뒤놀면
밤마다 그리던 임에게
쓰고 지우던 붙이지 못한 편지들과
기적을 크게 울리며
힘차게 오르내리는 기차 소리에
고된 마음을 하얗게 빨던 빨래터의
아낙들이 아이들을 앞세우고 제집으로 돌아간다.

토지가 기름지고
물이 흔하여 붙여진 이름 옥천(沃川)
그 땅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마음이 넉넉하고 사랑스러워
하늘과 땅,
사람과 바람이 아름다운 시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며 춤을 추고 있다.
#정지용 #옥천 #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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