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294) 도시적

― '마닐라의 도시적 삶' 다듬기

등록 2010.02.13 20:30수정 2010.02.1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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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의 도시적 삶

.. 또 1997년 밀어닥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마닐라의 도시적 삶에서 지칠 대로 지친 로잘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  <이매진피스 임영신,이혜영-희망을 여행하라>(소나무,2009) 325쪽


"글로벌(global) 경제위기 속에서"는 "세계 경제위기에서"나 "온누리 경제위기에서"로 다듬어 봅니다. "로잘리의 영혼(靈魂) 깊은 곳"은 "로잘리 넋 깊은 곳"이나 "로잘리한테 마음 깊은 곳"으로 손보고, "눈이 떠지는 순간(瞬間)이었다"는 "눈이 뜨는 때였다"나 "눈을 뜨는 때였다"로 손봅니다.

이 보기글을 통째로 고쳐쓰면 어떠할까 싶기도 합니다. "또 1997년 밀어닥친 세계 경제위기란 회오리바람 한복판을 지나며, 마닐라 같은 도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로잘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눈을 뜨는 때였다"처럼 고쳐쓸 수 있을 텐데, 요모조모 더 살피고 다시 살피면서 글월을 한결 알차게 가다듬어 본다면 좋겠습니다. 글월 하나를 가다듬느라 오랫동안 많은 품을 들이기 힘들 수 있을 테지만, 품을 들이는 만큼 더 빛나는 글이 되고 땀을 바치는 만큼 더 알찬 글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도시적(都市的) : 도시에 어울리는
 │   - 도시적 분위기 /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 /
 │     그 밖의 도시적인 온갖 장치들로 어지러이 범람하고 있는 거리 풍경
 ├ 도시(都市) : 일정한 지역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
 │   - 도시 생활 / 도시를 건설하다
 │
 ├ 마닐라의 도시적 삶에서
 │→ 마닐라라는 도시 삶에서
 │→ 마닐라 같은 도시에서 살며
 └ …

도시와 맞물리는 터전은 시골입니다. 도시라는 낱말 뒤에는 으레 '-적'을 붙여 '도시적'이라 쓰곤 하지만, 시골이라는 낱말 뒤에는 '-적'을 잘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골적'과 '시골틱' 같은 말을 쓰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여러모로 헤아려 보는데, 시골이라는 낱말에는 '시골스럽다'나 '시골답다'가 잘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도시라는 낱말 또한 '도시스럽다'나 '도시답다'라 하면 되는데, 어쩐지 이런 말투보다는 '도시적이다'처럼 적을 때가 한결 알맞거나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이렇게 써서 어쩔 수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네 도시 삶이란 온통 '쓰고 버리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에 말 또한 이 흐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수수하거나 조촐하게 살아가기보다는 겉을 꾸미거나 부풀리는 물결에 휩쓸리는 도시 매무새인 탓에 글 또한 이 물결에 따라 떠돌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 도시적 분위기 → 도시에 어울리는 느낌 / 도시 같은 느낌 / 도시 느낌
 ├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
 │→ 도시에 걸맞는 매끈한 아가씨 / 도시 느낌 물씬 나는 미끈한 아가씨
 └ 도시적인 온갖 장치들 → 도시다운 온갖 장치들 / 도시에 어울리는 온갖 장치들


국어사전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라는 글월이 있습니다. 뭐랄까, 꼭 이 보기글 같은 느낌인데, 도시를 말하는 자리에서는 이처럼 '-적'을 붙이고 '세련'되어 보인다고 하지 않으면 영 어설프거나 어줍잖은 듯합니다. '도시 냄새가 나도록 잘 차려입은 아가씨'를 놓고 "도시적인 세련된 아가씨"처럼 가리킬 텐데, 이런 말투를 어찌어찌 손질하기란 더없이 힘듭니다. 아니, 이 같은 말투는 아무 곳도 손질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도시사람처럼 잘 꾸민 아가씨'이지만, "도시사람처럼 잘 꾸민 아가씨"라고 말하기에는 알맞지 않구나 싶습니다. 오늘날은 한국방송이 아니라 케이비에스(KBS)이고, 우리 나라 이름은 한국이 아닌 코리아(KOREA)라고 하는 판이며, '아이 러브 코리아' 같은 말은 그냥 우리 말처럼 쓰고 있거든요.

엊그제 동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이 초등학교 건물 한쪽에 영어 한자 일본말 세 가지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큼직하게 새겨 놓고 있더군요. 언제 저런 글월을 붙였나 싶어 놀라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 아이들이 꿈을 품는가 싶어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꿈이란 푯말이나 외침말이 아닐 텐데, 아이들이 꿈을 품도록 하려면 아이들한테 땅을 두 발로 힘껏 디딜 수 있도록 도와야 할 텐데,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마치기 무섭게(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바라기만을 하도록 입시지옥으로 내몰 텐데, 이 나라 이 땅에서 무슨 꿈을 말할 수 있는지 영 알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곰곰이 따지고 보면 '도시적'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한국적'이나 '세계적' 같은 말이란 더없이 얄딱구리하기 때문에 이래저래 손질하기 힘듭니다. 처음부터 이 같은 말을 안 써야 하지만, 처음부터 이 같은 말로 생각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모로 손질을 해 보아도 '처음 글을 쓴 분들'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삶을 함께 바로세우거나 추슬러야 바로잡히거나 사랑스럽게 거듭나는 말이기에, 삶은 그대로 둔 채 말만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도시 삶을 더 아름답고 올바르게 가다듬지 않는다면 '도시적'뿐 아니라 숱한 겉치레 영어나 한자 찌꺼기를 털어내지 못합니다. 아니, 언제나 겉치레 영어에 휘둘리고 겉발림 한자에 휘감긴 채 살아갑니다.

아무래도 속치레보다 겉치레가 더 좋고 속가꿈보다 겉가꿈이 더 반가우니 이 흐름으로 나아가는 오늘날이라 하겠지요. 맑으며 곱고 알차게 일구는 삶보다 큰돈과 큰이름과 큰힘을 거머쥐려는 삶이 한결 즐거우며 좋다고 여기니 이 흐름으로 뻗어가는 우리 터전이라 하겠지요.

쥐데기 한 사람은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다운 삶을 찾으려 하지만 고작 쥐데기 몸부림입니다. 도시에서 도시다운 길을 슬기롭게 알아보며 밝히고 싶지만 한낱 어리보기입니다. 택시를 타며 택시삯을 내고 밥을 사먹으면 밥값을 치르며 책방에 가서 책읽기를 한다고 하지만, 제 둘레 어느 누구나 택시'요금'이요 '식대'나 '외식비'이며 '독서'이기만 합니다. 이런 판에 "도시적인 생활양식"이나 "도시적인 곳"이나 "세련미와 도시적인 심플함의 연출"이나 "도시적인 영화"나 "도시적이고 팜므파탈적인 모던한 신부의 모습"이나 "도시적 구성"이나 "도시적 이미지의 대표 배우"나 "도시적이면서 섹시한 파티 플래너 진 역"이나 "도시적 이미지의 축제의 거리" 같은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말마디가 날마다 수많은 사람 입과 손에서 끝없이 터져나오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저로서는 도무지 '도시가 어떤 모습 어떤 느낌'인지 알 노릇이 없는데 "도시적 이미지"를, "도시적 매력"을 어떻게 풀어내겠습니까. 아예 눈을 감거나 귀를 막거나 마음을 닫을밖에 달리 길이 없어 속이 아립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적 #적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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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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