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296) 천문학적

― '천문학적인 예산', '천문학적인 액수', '가히 천문학적이라' 다듬기

등록 2010.02.20 11:22수정 2010.02.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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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천문학적인 예산

 

.. 앞으로 쌀값을 안정시키려면, 정부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비싼 가격으로 쌀을 사들여야 한다 ..  <최도영-통계로 본 지구환경>(도요새,2003) 41쪽

 

"쌀값을 안정(安定)시키려면"은 "쌀값을 잡으려면"으로 손질합니다. '예산(豫算)'은 '돈'으로 다듬고, '가격(價格)'은 '값'으로 다듬습니다.

 

 ┌ 천문학적(天文學的)

 │  (1) 천문학에 기초한

 │  (2) 수가 엄청나게 큰

 │   -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 숫자 / 이 사업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하다

 ├ 천문학(天文學) : 우주의 구조, 천체의 생성과 진화, 천체의 역학적 운동,

 │     거리ㆍ광도ㆍ표면ㆍ온도ㆍ질량ㆍ나이 등 천체의 기본 물리량 따위를 전

 │     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 돈을 어마어마하게 들여

 │→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써서

 └ …

 

하늘을 살피는 학문이라는 '천문학'입니다. 천문학은 천문학일 뿐인데, 언제부터 이 낱말 뒤에 '-적'을 붙이면서 "수가 엄청나게 큰"을 가리키게 되었을까요. '천문학적 (2)' 말풀이처럼 우리들은 예부터 '엄청나게'를 썼고, '어마어마히게'를 썼습니다. '수없이'와 '숱하게'와 '셀 수 없이'를 썼고, '대단히'와 '몹시'와 '매우'를 넣으며 많디많음을 가리켰습니다. 하늘에 뜬 별처럼 많다고 한다면 "하늘에 뜬 별처럼 많이"라 말하면 됩니다. 또는 "모래알처럼 많이"라 이야기하면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우리 말을 지어서 쓰면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삶에 바탕을 두며 우리 글을 살려서 쓰면 됩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 눈치를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숱한 바깥말에는 아랑곳하지 말고 우리 넋과 얼을 살리는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일본 지식인이 즐겨쓰는 말투를 우리가 즐겨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멀리하거나 우리 말투에서 등돌릴 까닭이 없습니다. 영어바람이 분다 하여 이 바람에 흔들릴 까닭이 없습니다. 세계화나 글로벌이라는 말이 떠돌아도, 이 땅에서 우리 이웃하고 우리 말글을 옳고 알맞게 쓰지 못한다면 아무 뜻이나 값이 없습니다.

 

 ┌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 숫자

 │→ 생각하기 힘든 엄청난 숫자

 │→ 꿈꾸기 힘든 놀라운 숫자

 │→ 헤아리기 힘든 대단한 숫자

 ├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하다

 │→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

 │→ 어마어마하게 많든 돈이 든다

 │→ 끔찍하게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

 └ …

 

엄청나게 많으니 '엄청나다'고 말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크니 '어마어마하다'고 말합니다. 늘 있는 그대로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그대로입니다. 노상 보는 그대로입니다.

 

아주 많은 숫자를 놓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를 넣어 가리키기도 하고, '끔찍하다'를 넣어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 말은 우리가 살아온 자취와 넋과 냄새와 기운이 모두 배어 있습니다. 때와 곳에 따라서 다 다른 말마디와 글줄로 우리 생각과 뜻을 담아냅니다. 많고 많음은 "더없이 많다"나 "그지없이 많다"나 "끝없이 많다"나 "끝도 없이 많다"로도 나타냅니다. 어느 곳에서는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파리떼처럼 많다"고도 하겠지요. 느낌을 살리고 키우며 북돋우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ㄴ. 천문학적인 액수

 

.. 금전등록기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찍어 놓은 인내심 많은 계산원이 기다리거나 말거나 거만해 보이는 남성과 여성은 가벼운 내용의 휴대폰 통화에만 열중했다 ..  <마이클 예이츠/추선영 옮김-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이후,2008) 311쪽

 

'참을성'을 한자로 옮겨적으면 '인내심(忍耐心)'입니다. '잘난 척하'거나 '남을 업신여'기거나 '얕잡아보는' 사람을 가리켜 '거만(倨慢)하다'고 합니다. "가벼운 내용(內容)의 휴대폰 통화(通話)에만 열중(熱中)했다"는 "손전화로 가벼운 수다를 떠느라 바빴다"로 손질해 줍니다.

 

 ┌ 천문학적인 액수를 찍어 놓은

 │

 │→ 엄청난 돈을 찍어 놓은

 │→ 말도 안 되는 돈을 찍어 놓은

 │→ 터무니없는 돈을 찍어 놓은

 └ …

 

이 자리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나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금전등록기에 찍어 놓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주 많은 돈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글로 옮겨적을 때에는 말 그대로 옮겨적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천문학적'처럼 적어야 느낌이 살거나 알맞다고 보기 때문일까요. 많으니 '많다'고 하는데, '많다'고만 적으면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일까요. "비싼값", "높은 값", "큰 값", "많은 값"처럼 적으면 어울리지 않다고 여기는가요.

 

수수한 삶이 바탕이 되어 수수한 생각이고, 수수한 생각이 모여 수수한 말이 이루어집니다. 남보다 더 벌고 남보다 더 얻으며 남보다 더 누리려는 삶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겉치레와 겉멋을 드높이는 삶이 됩니다. 겉멋을 드높이는 삶이니 겉을 꾸미는 생각이요 겉치레 말글이 됩니다. 남보다 적게 벌고 조금 얻고 낮은 자리에서 누리더라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 삶이라면 저절로 수수한 멋과 조촐한 맛을 살리는 생각과 말글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 삶은 더없이 꾸미는 삶이기에 말 또한 더없이 꾸미기만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삶은 그지없이 부풀리는 삶이기에 말 또한 그지없이 부풀리기만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삶은 조용히 어깨동무를 하거나 넉넉히 두레를 하는 삶이 아니기에 서로를 더 살피면서 웃음과 눈물을 고루 나누는 말하고는 더더욱 동떨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ㄷ. 가히 천문학적이라

 

..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겠다 ..  <이자와 고타로/고성미 옮김-사진을 즐기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2009) 5쪽

 

 '가(可)히'는 '거의'나 '얼추'로 다듬습니다. '셔터(shutter)'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사진기 단추'로 손질해도 됩니다.

 

 ┌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겠다

 │

 │→ 끝없이 많다 할 수 있겠다

 │→ 셀 수 없이 많다 할 수 있겠다

 │→ 더할 나위 없이 많다 하겠다

 └ …

 

나날이 쓰임새가 줄어든다고 느끼는데, 우리 말에 '하고많다'와 '하고하다'가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이 같은 말을 안 쓰고 있으니 우리 아이들은 이 같은 말을 들을 일이 없고 읽을 자리가 없으며 받아들이거나 새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고하다'와 '하고많다'는 한 낱말이면서 '많고많다'는 한 낱말이 아닙니다. 참 얄궂다 하겠는데, 우리 모습이 이렇습니다. 말글을 다루는 어른은 말글을 다루는 어른대로 우리 말글을 얕보고, 말글을 다루는 일을 안 하는 어른은 또 이분들대로 우리 말글을 막 굴립니다.

 

 ┌ 하고하다 / 하고많다

 └ 많고많다 / 많디많다

 

많다고 할 때에 그냥 많지 않고 몹시 많기에 '하고하다'를 씁니다. 많은데 대단히 많기에 '하고많다'를 씁니다. 많은 숫자가 어마어마하기에 '많고많다'를 씁니다. 많은 크기가 놀라우기에 '많디많다'를 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꾸리는 삶터에서는 '하고하다'는커녕 '많디많다'조차 듣기 어렵습니다. 그저 '천문학적'입니다. '천문학적'은 하루가 다르게 쓰임새를 넓히고, 우리가 예부터 이 땅에 알맞게 빚어낸 말마디는 하루하루 스러지거나 빛을 잃습니다. 하늘에서 친일부역자가 뚝 떨어져서 우리 말마디가 엉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난데없이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우리 글줄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말이고, 우리 발로 짓이기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20 11:22ⓒ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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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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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적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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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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