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사 준단다, 큰일났다

세탁기를 보낸 누이, 냉장고까지 보낸다는데

등록 2010.02.23 17:19수정 2010.02.2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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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솟옷 빨래, 이즈음은 이러한 풍경이 마음에 썩 든다. ⓒ 김수복


충북 옥천 무슨 전자제품 대리점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세탁기를 보내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단다. 무슨 느닷없는 소리냐고 하니 누이의 이름을 댄다. 그 사람이 내 여동생인데 당신이 어떻게 그 사람을 아느냐고 하니 세탁기 발송을 의뢰했고 대금도 이미 치렀단다.


여기는 전북 고창인데 옥천에서 여기까지 배달을 온다는 게 뭔가 커다란 낭비인 것 같아서 그 말을 했더니 껄껄 웃어댄다.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로 연락하면 거기서 배송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몰랐다. 판매망이 그렇게까지 광역화되어 있는 줄을. 그나저나 심난하다. 어머니의 속옷을 비누칠해서 빠는 데도 이제 어지간히 이력이 붙어서 그럭저럭 해낼 정도가 되었는데 새삼스럽게도 세탁기라니.

솔직히 어머니의 속옷을 손으로 빨 때마다 이유도 뭣도 없이 더러 민망하기는 했었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달리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고 제아무리 세뇌공작을 해봐야 그때 그 순간들뿐이었다. 처음에는 아예 안 보려고 애를 써가며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줄에 널 때도 얼른얼른 해치웠다. 걷을 때도 무슨 금기된 것이라도 만지듯이 살짝 외면한 채로 후딱 나꿔채서 다른 옷들 속으로 감춰버리곤 했다. 그게 무슨 '지랄'이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고 그저 웃음이나 나올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유 같은 것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남성용 속옷은 '빤스'라고 투박하게 불러도 얼마든지 괜찮을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빤스'가 제대로 된 표현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성용 속옷은 반드시 '팬티'라고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색상에서부터 크기, 모양새 등등 '빤스'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미안스러워지는, '팬티'라고 불러줘야만 제대로 된 예우일 것 같은 뭔가 은밀한 분위기가 어머니의 속옷에는 있었다.

게다가 나 자신은 팬티든 빤스든 속옷을 거의 입어본 적이 없었다. 남의 집에서 여럿이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할 일이 있을 때거나, 남녀혼성 그룹에 섞여 뭔가 일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서너 장 갖춰놓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속옷이란 일종의 구급약품 성격인 셈이었다. 속옷을 거부한 이유와 그 정확한 기원은 다소 애매하지만, 아마 풍욕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지퍼를 올리거나 내릴 때 가끔 살이 끼여 곤욕을 치르면서도, 속옷을 안 입었을 때의 헐렁하고 가뿐한, 결심만 굳히면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치마를 입고도 싶었지만, 치마야말로 어쩌면 남성용 의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차마 그것을 입고 다니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나 자신의 속옷을 빨아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아마 더더욱 어머니의 속옷을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게 민망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누이가 왔을 때 우스개로 잠시 했었고, 누이도 역시 빙그레 웃는 것으로써 응답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이는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창에서 옥천까지,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되지만 버스를 4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까닭에 서울보다도 훨씬 멀어져 버리는 그 길을 가는 동안 생각에 또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로 당장 세탁기부터 있어야겠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손빨래에 익숙해 있었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수건이든 뭐든 죄다 꺼내놓고 비누칠을 해서 박박 문질러대는 일종의 취미생활로까지 승격시켜 놓고 있던 참이었다.

"아야, 뭔놈의 세탁기를 보낸다는 것이냐?"
"세탁기가 세탁기지 뭔놈의 세탁기는 무슨, 하는 김에 냉장고도 지금 바꿨으면 좋겠지만 내 사정이 있으니까, 봄이 끝날 무렵에나 바꿔줄게."
"뭐야? 냉장, 아니 그건 또 뭔 소리라냐?"
"뭔 소리는 무슨, 그게 어디 냉장고야? 그 안에 음식 넣어두었다가는 없는 병도 생기겠더라."

산 너머 산이라더니 꼭 그런 짝이다. 냉장고를 바꿔준다고? 허헛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세탁기는 그런대로 유용하게 사용할 일이 있겠지만 냉장고는 아니다. 전혀 아니다. 누이는 냉장고가 오래되어 반찬 맛이 달라지고 전기료도 많이 든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전기료가 더 든다고 해봐야 한 달에 몇백 원이고, 반찬 맛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글쎄, 확실한 무슨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소문'으로나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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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난 냉장고. 늙었어도 건강한 이녀석을 이제 버리라고 주장하는 누이를 나는 고마워해야 하는지 원망해야 한는지 갈피를 못 잡겠다. ⓒ 김수복


"오빠한테 사주는 거 아니여. 엄마한테 사주는 거라니까"

도시에 있을 때 집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텔레비전이 형체도 없이 녹아버릴 정도의 지독한 불이었다. 전세방이었는데 전세금도 한푼 받지 못한 채 그야말로 알몸이 되어 나앉게 되었다. 보증금은 없이 월세만 선불로 내는 쪽방 하나를 얻어 들어가서 맨 처음 구입한 전자제품이 냉장고와 비디오였다. 냉장고는 먹다 남은 라면냄비라도 넣어둘 찬장을 겸한 것이었고, 비디오는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영화라도 보면서 새로운 꿈을 찾아보자는 매우 계산적인 판단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당연히 새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중고를 샀는데 냉장고는 어느 신혼부부가 분가한 지 이 년 만에 다시 본댁으로 들어가게 되어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년밖에 안 된 거의 새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것들과 함께 삼 년여를 살다가 고창으로 왔고, 고창에서 십삼 년을 살았으니, 합하면 십팔 년, 냉장고의 나이는 그랬다. 십팔 세. 하지만 아직까지 파업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었다. 냉동실에 성에가 잔뜩 끼여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일은 있었다. 그럴 때는 전원을 하루 정도 차단시켜주면 묵은 때를 벗긴 것처럼 시원하게 잘 돌아가곤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바꿔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누이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투다.

"아이 참, 남자가 뭔 말이 그렇게 많어. 오빠한테 사주는 거 아니여. 엄마한테 사주는 거라니까."
"엄마, 엄마라고?"
"그려어. 다 큰 남자한테 내가 무슨 냉장고 사줄 일 있간디."

이렇게 되면 나도 말문이 막힌다. 치매로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들보다 딸이 더 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냉장고를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오래된 냉장고는 가장 고단했던 시절을 같이 해준 나의 분신 같은 것이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을 어떻게 폐기할 것인가. 집안 한쪽에 보관한다는 것도 그렇다. 집이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쓰임이 있는 법이다. 쓰지도 않는 냉장고를 처박아둘 자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볼 때마다 못 본 체, 혹은 안 본 체 외면을 해야 할 텐데 빤히 예견되는 그런 고충이 생각만으로도 아득한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헌 냉장고를 준다고 하면 가져갈 사람도 없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하기가 싫고, 누이가 사 준다는 냉장고를 누구에게 준다면 나중에 누이가 나를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살다가 참 별 이상한 고민을 다 하게 되었다. 도대체가 이것은 행복한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좀 껄끄러운, 난감한 고민이 아닌가 말이다.
#오래된 냉장고 #세탁기 #정많은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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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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