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님을 바꿔야 나라가 바로 선다

[역사소설 민회빈강2]정치에 왕도 없다. 신뢰가 으뜸이다

등록 2010.02.24 11:01수정 2010.03.2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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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요충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는 이곳을 공략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 이정근


"이형익과 조숙의도 나쁜 년 놈이지만 진정 쳐 죽일 놈은 김자점이다. 그 놈이 어떤 놈이냐. 병자년 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의주 용골산 봉화를 보고서 '소식이 도성에 이르면 소란스러워진다'고 묵살했던 놈이 바로 그놈이다. 부관이 적정을 보고하자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히려 드느냐?'고 칼을 빼어 신용을 죽이려 했던 놈이다. 이런 놈이 서북방면군 도원수에 있었다니 나라가 망해도 싸다. 군율에 따라 열 번 죽어도 모자랄 이런 놈이 살아남아 임금의 총기를 흐리고 있으니 고달픈 건 우리 백성들뿐이다."

안익신이 동지들의 분기에 불을 지폈다.


"그 놈도 나쁜 놈이지만 더 나쁜 놈들의 일당이 바로 아랫마을에 살고 있소. 호란 전, '명나라와 교호를 끊고 형제의 나라로 살자'고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신의 목을 베자'고 주장한 놈이 있소. 그 놈이 그 다음에 한 말이 가관이오.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 쳐서 물리치겠다'했소. 헌데, 어찌 된 줄 아시오. 정작 오랑캐가 양철평을 통과하여 도성 가까이 쳐들어오자 다섯째 아들은 세도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강화도로 도망갔소. 강화도가 어디 우리 같은 천민들은 피난이나 갈 수 있는 곳이오?"

이지험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들어갔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 녀석은 변복하고 빠져나와 금산에 숨어들었고 그 녀석의 마누라는 '되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목을 매었소. 이렇게 비루한 족속들이 자결한 여인을 열녀라 칭송하고 정려각을 세워 기려야 한다고 요란을 떨고 있소. 여인의 뜻은 가상하지만 이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놈들의 비열한 면피행동이오. 나라를 굳건하게 지켰으면 그러한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힘이 약해 당했으면 같이 당해야지 여자는 죽도록 놔두고 지놈들은 도망가고 참 뻔뻔한 놈들이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라 핍박하고, 지켜주지 못하여 죽어간 여인을 열녀라 치장하여 또 다른 여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책임 있는 사내들은 새장가 들고, 참 지랄 같은 세상이오."

"그 집이 어디냐? 당장에 쳐내려가 박살을 내버리자."
산채가 술렁거렸다.

"바로 아래동네 병사리다."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듯이 사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자들 진정하라. 우리가 이렇게 일어선 것은 호족 한 둘을 징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우리가 매일같이 닭의 벼슬을 닮은 산을 바라보며 절을 하는 것이 닭 짓이란 말이오?"
닭의 볕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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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닭의 볕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이정근


"여덟 아들을 데리고 나가 싸우겠다고 허언한 그 자는 이미 6년 전에 죽었고 금산에 들어간 그자의 손자가 약관 16세로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 수학하며 하래비의 망령된 생각에 의문을 품고 있다하니 싹수가 조금 있어 보인다. 모름지기 이 나라 사대부들은 존주양이를 생명으로 삼고 대명일월 백세청풍을 희망으로 여기고 있으니 머리가 꽉 막힌 수구먹통들이다."

유탁이 뜨거운 열기를 가라앉혔다.

"그 어려운 한자 쓰지 말고 존말로 풀어서 말해 주시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쉽게 풀이하기는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과거에 급제했던 권대장이 하는 것이 낫겠소."
유탁이 권대식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앉아 있던 권대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존주양이(尊周攘夷)는 주나라를 받들고 오랑캐를 멀리하자는 말이고, 백세청풍은 은나라가 망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고사리만 캐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다. 언뜻 보기에는 지조 있는 선비처럼 보이지만 어리석지 않은가? 이러한 사람을 성삼문은 '고사리는 주나라 것 아니더냐? 그냥 굶지 그건 또 왜 먹나?'라며 백이와 숙제조차 나무란다. 이것이 우리나라 선비들의 정신세계다."

"우리 산채에는 남문과 북문 두 개밖에 없는데 삼문은 또 뭐냐?"
홑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벙거지 쓴 사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런 훈장 밑 닦다 들어온 놈 봤나? 새빠닥 말아 넣지 못해"
벙거지가 눈알을 부라렸다.

"잡소리 거두고 얘기를 잘 들으시오."
권대식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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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청풍.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집터에 남아있는 글씨. 종로구 청운동에 있으며 원래는 대명일월백세청풍이었으나 일제시대 대명일월은 훼손되고 백세청풍만 남아있다. ⓒ 이정근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말아먹은 사대부들은 존주양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명나라는 떠받들어야 할 대상이고 청나라는 배척해야할 오랑캐라는 것이다. 대명일월(大明日月)은 단순하게 풀이해서 밝은 해와 달이 아니다. 명나라 시절로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그날이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의 백세는 오랜 세월을 의미하고 청풍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를 뜻한다. 이러한 글귀를 장동 김대감은 자신의 집 후원 바위에 새겨놓고 따르는 떨거지들에게 가르쳤다. 나는 북경에서 명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다. 명나라가 망했는데 무엇을 존중하고 어떻게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한심한 노릇이다."

말을 잠시 멈춘 권대식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나라는 대륙에 붙어있는 혹처럼 생겼다. 사람들은 그것을 '호랑이처럼 생겼다' '토끼처럼 생겼다' 하지만 나는 사내들의 양물처럼 생겼다고 본다. 불같이 일어나고 쉬 사그라지는 성질도 닮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숙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주변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 해양세가 성(盛)하면 해풍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대륙세가 성하면 대륙의 변동에 민감해야 백성들이 편하다. 꼭 배신 때리자는 것이 아니다. 땅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하찮은 미물도 근거지를 옮긴다 하지 않은가. 하물며 인간이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버러지만도 못한 처신이다."

"옳소."
"지당하신 말씀이오."
환호가 빗발쳤다.

"50년 전. 임진년 난리 때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도와줬다. 도움 받은 것 인정한다. 은혜를 입었다고 영혼마저 넘긴다면 넋 빠진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나라 사대부들은 소중화 사상에 빠져 대륙의 변화를 외면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백성들이 죽고 다치고 욕을 당하고 춥고 배고프다. 이러한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임금을 바꿔야 한다. 임금을 갈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

"우와 우우."
우레와 같은 호응이 산채를 흔들었다.

덧붙이는 글 | 양철평-조선시대 지명. 오늘날의 녹번동 일원이다.


덧붙이는 글 양철평-조선시대 지명. 오늘날의 녹번동 일원이다.
#병자호란 #강화도 #환향녀 #존주양이 #백세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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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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