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토요일마다 노인정에 몰리는 까닭

'관악사회복지'의 직장인 자원활동가들을 만나다

등록 2010.03.17 21:16수정 2010.03.1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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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랜돌프메이컨 대학의 총장이었던 로저 마틴은 폐암으로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야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환상 같은 꿈에 도전하기로 했다.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 다시 대학 신입생이 된 것이다. 그는 세대차를 극복하고 친구를 사귀었고, 이미 베테랑 인문학자임에도 스무 살의 눈으로 호메로스를 읽으며 삶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고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는데, 이 소식은 일상에 매몰되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그는 지금 현재 건강하게 활동하며 살고 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청춘예찬>에서 민태원은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으므로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멋지고 가슴 설레는 말이긴 하지만, 고용불안이 계속되고 경제난이 과중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요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조사에서 '꿈과 희망이 없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과반을 넘는 경우를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이런 시대에 이상(理想)을 품는다는 것은, 혹은 꿈을 꾼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토요일이면 노인정에 모여드는 청년들

여기 주목할 만한 젊은이들이 있다. '낮은 곳에서 일구는 숲'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지역 NGO '관악사회복지'의 직장인 자원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노인정으로 간다. 삼성동이라는 이름으로 동명을 바꾸어 뉴타운 개발이 한창인 신림6동의 원신노인정과 신림10동의 율곡노인정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해 떨어질 때까지 이들은 노인정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벗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도 없다. 다만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함 없이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을 '꿈꾼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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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꾼이 부부 임신 소식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하러 왔다는 부부의 얼굴에는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 이태향


'꿈꾼이'들의 활동은 일상적이다. 노인정에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가벼운 체조를 하고, 명상을 하거나 뜸을 뜬다. 매월 마지막 주에는 밑반찬을 만들어 혼자 사는 노인들의 집에 가져다 드린다. 연간 큰 행사는 어르신 나들이를 준비하는 것과 작은 텃밭 일구는 일을 돕는 것이다. 노인정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매주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손자 손녀 같은 녀석들이 와서 손을 맞잡고 수다를 떨고, 안마를 해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렇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공동체였다.

"손 내밀어 손 붙잡아 주고 싶습니다"

9년째 자원 활동을 하고 있는 윤홍용 꿈꾼이. 그는 자원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다. 노인정에 가서 그가 하는 일은 출석을 부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80명 정도의 어르신이 두 곳 노인정에 등록되어 있지만 매주의 출석 인원은 반에 미치지 못한다. 자주 아프고 거동하기 힘든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석하지 않은 분들의 안부를 기억하고 챙기는 것이 그의 몫이다. 활동 초기에는 알고 지낸 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그것 또한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생각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윤홍용 꿈꾼이의 목소리는 우렁차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들은 그가 들어서면 활기차지고 그와 손 맞잡고 사랑한다고 외친다. "할머니, 나한테 푹 빠지셨어"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화답하면 노인정이 행복한 웃음바다가 된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자원 활동에 대해 '나를 살려서 움직이면 이웃도 살아나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고 소신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외치는 구호는 사뭇 기도(祈禱) 같다.

"나는 매일 하루씩 젊어진다! 나는 매일 한 번 더 칭찬한다! 나는 항상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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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용 꿈꾼이 <출석부르기>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신나는 놀이다 ⓒ 이태향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꿈꾼이들은 봉사활동을 가는 노인정을 '은빛교실'이라고 부른다. 몇 해 전부터 관악구 내에 위치한 메가존㈜의 봉사동호회 '사랑더하기, LOVE+'에서도 은빛교실에 동참했고, 서울여상 박영하 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도 봉사활동을 오게 되면서 은빛교실은 더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3월 13일은 은빛교실 개학일이었다. 무더운 여름철과 길이 미끄러운 겨울철에 잠시 방학을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꿈꾼이들은 가정방문을 한다고 했다. 대부분이 홀로 사는 노인들인 까닭에 직접 방문하여 생활을 보살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학식에서도 맨 처음은 출석을 부르는 일로 시작했다. 김외생, 박금분, 김옥선....... 이름만 들어도 나이 대를 짐작할 수 있는 이 할머니들은 이날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하고 그렇게 학교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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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케익을 자르는 원신노인정 할머니 할아버지 잔치에 떡이 빠질 순 없지 ⓒ 이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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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웃으면 하루가 젊어진다 웃으며 노래하는 율곡 노인정 할머니들과 함께 ⓒ 이태향


평균 나이가 90이라는 이곳 노인정에서 자신을 '막둥이'라고 소개한 할아버지는 고희가 훌쩍 넘은 나이였다. 전쟁과 가난으로 힘든 시절을 살아오면서 어른들 모시고 사는 처지에 어린 자녀들에게 한번 안아주는 사랑의 표현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은 토요일마다 젊은 친구들을 만나는 게 낙이라며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고 했다.

이날 봉사활동을 나온 서울여상 학생들은 준비한 공연을 하기 전에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훌륭한 금융인이 되고 싶은 김하연입니다"하는 식이었는데, 노래가 끝나고 나자 박수를 치던 조선익 할머니(82)께서 "그 포부 다 이루어지길 바랄게요"하고 덕담을 해주었다. 학생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졌고 그 자리에 있던 할머니들 모두 "그래, 그래"하며 맞장구치는 분위기가 따뜻하고 정겨웠다.

우리나라의 노인인구는 1990년 전체 인구의 5.12%에서 2003년에는 8.3%를 기록했고, 2019년에는 14.4%에 육박하여 명실공히 고령사회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통계청 2001). 이것은 유래가 없을 정도의 가파른 성장속도다. 특히 현세대의 노인인구는 일제 강점기에 출생하여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경험하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들이다. 많은 수의 자녀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노후에 대한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세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부조에 의한 일차적 노인보호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고령사회에 대비한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외면할 수 없는 현 상황이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꿈꾼이들은 '이웃 공동체의 회복'에서 해법을 찾는다. 홀로 사는 노인의 가정에 동작 감지센서를 부착해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으면 생활 복지사에게 알려주는 국가적인 차원의 전문적 복지서비스도 유용하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와 내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찾겠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진정한 '보살핌의 문화'는 공동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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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은 매콤달콤하게 무쳐놨고 부추전만 준비하면 잔치 시작이다 ⓒ 이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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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사온 베개커버를 씌우고 있는 꿈꾼이들 '돌봄'은 가식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태향


노인은 행동을 원한다 ADA(Age Demands Action)

ADA는 저소득 독거노인을 돕기 위해 설립한 국제 헬프에이지(HelpAge International global network)의 선언이다. 노인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일방적인 보살핌의 수준에서 진일보하여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성숙한 소통의 문화가 필요하다. 더하여 노인은 우리 세대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 충분히 기여한 세대이고, 이들이 건강과 안녕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다. 특히 홀로 사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지지망에 대해서는 지역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절실하다. 이웃은 잠재적인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으며 빌릴 수도 훔칠 수도 없고, 오직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만이 찾아내 누릴 수 있는 소담한 공동체. 이것이 꿈꾼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관악사회복지 #노인 #꿈꾼이 #공동체 #이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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