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 김영만 위원장이 50년 전 3.15의거 시위에 가담했다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윤성효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시신을 안치해 놓았는데, 그해 4월 13일 밤 11시경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경찰은 시신을 탈취해 갔다. 고향 남원에서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억울하고 원통하다"며 대성통곡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선산에 묻고 말았던 것.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대표 백남해․박영철)가 오래 전부터 '범국민장'을 계획하고 준비해 왔다. '50년만의 해원,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은 오는 4월 11일 시신 인양지인 마산 중앙부두에서 열린다. 시신이 인양된 날에 맞춰 '범국민장'을 열기로 한 것.
운구행렬도 이어진다. 시신인양지를 출발해 마산의료원-3․15의거탑-남성동파출소-창동-북마산파출소-용마고까지 거리행진(약 3km)한 뒤 차량으로 남원까지 이동한다.
범국민장은 '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가 주관한다. 마산지역 추모사업회 회장을 지낸 김영만 위원장이 맡았다. 그는 김주열열사와 마산상고(현 용마고) 입학동기가 인연이다.
김영만 위원장은 "김주열은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마산 곧 영남의 아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는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면서 "영호남 갈등이 심한데 우리 역사 속에는 김주열만큼 동서화합의 상징적인 인물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김주열은 이모할머니 집에서 데모 구경하다 변을 당했다'는 등 김주열을 폄훼하는 소문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마산에서 나돌기 시작했다"며 "이번 범국민장을 통해 잘못된 소문은 진실이 아님을 알리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만 위원장은 3․15의거 정신은 '저항정신'과 '대동정신'이라고 밝혔다. 최근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열린 첫 기념식에 대해, 그는 "주객이 전도 됐다"며 "신동엽 시인이 4․19에 대해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념일 제정이라는 것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흘림에 희생당한 민주열사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국가적 차원의 예우다"면서 "국가가 산 사람을 보고 수고했다고 주는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산에 3․15와 관련된 단체는 많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원을 받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은 건물에서 사무실을 사용하는 단체도 있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는 지원도 받지 못하고, 마산 오동동의 상가 건물에 있는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 간판만 붙여 놓고 같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추모사업회는 지금까지 김주열 열사를 '제대로 모시기' 위한 많은 사업을 벌여 왔다.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를 제작하고 있는데, 오는 4월 17일 마산에서 시사회를 연다. 김영만 위원장은 다큐멘터리 시나리오와 연출까지 맡았다.
"독재정권의 하수인, 경찰이 탈취한 열사의 시신"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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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추진위원회 발족(1999년 1월) - 남원 추모사업회 발족(1999년 3월) - 마산 '3.15정신계승 동서순례단' 발족(1999년 3월) - 제1회 김주열열사추모제(1999년 3월 14일) - 남원 금지중-마산상고 형제학교 결연(1999년 4월) - 마산 추모사업회 창립(2000년 2월) - 김주열 열사 흉상 제막(용마고)(2000년 3월) - 김주열 열사 진혼제(시신 인양지점)(2001년 4월 11일) - 남원 '김주열로' 지정, 표지석 준공(2001년 4월 19일) - 마산 시신 인양지 '역사 표지판' 제막(2002년 4월) - 3.15 오적 심판식(2005년 3월) - 소통과화합을위한 186 김주열 대장정(2007년 4월) - 김주열 열사 흉상․조형물 제작(마산)(2008년 4월) - 김주열과 함께하는 꽃담축제(2009년 4월18~19일) - 다큐멘터리 <민주횃불 김주열 열사> 제작(남원)(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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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장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지난 18일 저녁 김영만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문이다.
- 당시 김주열 열사의 장례를 제대로 안 치렀다는 말인지?"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해 4월 11일 마산 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이 떠올랐다. 그 날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 시민들이 병원을 에워싸서 지키고 있었다. 13일 밤 11시경이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병원을 지키고 있던 시민들이 장대비가 내리니까 느슨해졌다. 그 순간 경찰이 시신을 탈취했다.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병원 뒷문으로 시신을 빼내 남원으로 내달렸다. 다음 날 새벽이 도착했고, 그날 아침 김주열 열사의 고향 동네로 가져갔다.
- 김주열 열사는 고향에 편안히 잠들었는지?"어머니(권찬주)가 아들의 시신을 보고 못 받겠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나는 억울하고 원통해서 자식의 시신을 남원에서 인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선산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4.19묘역과 3.15민주묘지에 김주열 열사의 묘소가 있지만 그것은 가묘다."
- 당시 시신은 어땠다고 하는지?"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간 뒤 마산시민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남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시신을 그 때나 지금이나 가족들에게 확인시키는 게 관례였다. 당시 관 뚜껑을 열어줘도 가족들이 확인을 거부했다. 김주열의 형(김광열)의 친구들이 확인했다. 시신을 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완전히 팅팅 불어 있는 몸에 바다이끼가 끼었다고 한다. 엉망진창이었다. 시신을 닦지도 않고 벗겨진 채로 보냈던 것이다."
- 남원의 장례는 어땠는지?"그런 상황에서 경찰들이 유가족을 아무리 달래려고 해도 달래지는 게 아니었다. 경찰이 억지로 선산에 묘를 파서 안장을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전혀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파악했는지?"김주열 추모사업을 하다 보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알았다. 어머니가 했던 말은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장례식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증언도 있다. 김주열 형(김광열)의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적으로 하용웅(68) 선생이다. 그 분은 김주열과 같은 동네에 살았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 선생과 김주열의 형과도 친하게 지냈다. 김주열은 하용웅 선생의 권유로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 온 것으로 안다. 하용웅 선생이 그 해 마산상고를 졸업했던 것이다."
- 김주열 열사가 마산으로 유학 오게 된 배경에 대해 들었던 증언이 있다면?"당시 김주열 열사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업고교를 나오면 은행에 취직하기 쉽고, 은행에 취직해 가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김주열의 생각도 일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