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22회)

강물 속에 숨다 <2>

등록 2010.03.19 11:08수정 2010.03.3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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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리기에 앞서 제가 이집에 오기 전의 일을 고하겠습니다. 저는 지방 관아를 떠돌며 세월을 보낸 임철귀 어른의 사인이었습니다. 한양 판관으로 도임 받게 돼 지방 관아를 떠나게 되자···."

정약용이 불쑥 물었다.


"지방 관아 어딘가?"
"고흥입니다. 고흥에 계실 때 크고 작은 일을 시생이 처리했습니다. 오늘날 판관으로 도임돼 편히 낙향해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고흥에서 만난 풍수사 덕이었습니다. 그 댁에 백미 열 가마를 주고 땅을 구했기에 오늘날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고 집안이 화락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엔 서 관찰사가 본래의 사건으로 돌아와 물었다.

"다른 얘긴 필요할 때 물을 것이다. 폐일언(蔽一言) 하고, 지난밤 어디서 무얼 했는지 말하라!"

"제가 주인어른의 부름을 받고 그 댁에 도착한 건 오후 다섯 시 경이었습니다. 전날 데려오라는 초희란 종년이 하루 전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겸사겸사 해서 들른 것이지요. 나으리는 시오리 떨어진 다부리(多夫里) 마을에 가서 박 초시를 만나 쌀 스무 섬에 해당하는 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틀림없이 변제한다 했으니 쌀 스무 섬과 그에 상당하는 이자를 받아오라 한 거지요. 다부리까지 가게 되면 인근 마을에 권씨 부인이 볼 일 있다 했으니 안방에 들러 부인의 말을 듣고 떠나라 하기에 시생은 부인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출발해 비석거리 포구(浦口)에서 사공 일을 하는 이서방을 만났습니다. 그런 다음 밤길을 더듬어 다부리 마을에 들러 박초시를 만났습니다. 그때가 저녁 10시가 다 됐을 때였습니다. 박 초시는 먼 길을 왔다 하여 술상을 차렸으나 나는 너무 피곤해 건넌방에 자리를 보아달라고 한 후 아침이 되어서야 쌀을 달구지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불러 조사해 보면 아실 일입니다."

과연 주위 사람과 이서방 그리고 박초시를 불러 어젯밤 모구서의 행적을 물으니 사실대로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약용은 강한 의혹을 지우지 못했다.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초희란 종년이 오래전부터 모구서의 첩이 돼 심심하다 싶으면 화간(和姦)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의 진원지가 이집 상머슴 정길상(鄭吉翔)에게서 흘러나왔던 점에 서 관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소문을 퍼뜨린 건 무슨 의도냐, 네가 보았느냐?"
"소인은 어릴 때 그 댁에 들어가 20년 넘도록 지내왔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구린내 나는 부분까지 모른 게 없을 정돕니다."


"하면, 은혜를 입었지 않은가.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오갈 데 없는 널 가르치고 지금껏 길러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주인을 배신할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소인은 주인어른께 입은 은혜보다 원한이 더 깊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주인어른은 가지고 놀던 종년 언년이를 내게 시집보냈습니다. 심부름을 시켜 소인을 멀리 보낸 후 제 계집인양 가지고 논 것이 양손을 꼽고도 남습니다. 한번은 한양에 심부름을 다녀왔는데 여편네가 대들보에 목을 매 죽었다는 처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미안했던지 주인어른은 쌀 열섬을 주며 장사를 후히 치르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사는 데 미련이 남지 않아 날마다 방구석에 누워 이 공상 저 공상으로 하루 해를 보냅니다. 소인이 세상살이에 무슨 미련이 남았겠습니까."

정길상의 이런 말과는 달리 다른 소문도 있었다. 그것은 언년이가 목을 매단 후, 때마침 임철형이 출타 중이어서 직접 부인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언년이는 부인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귀띔 때문이었다. 때는 이른 겨울철이었지만 오후 7시면 한밤중이다.

"마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정길상은 방으로 들어가자 무릎걸음으로 앉아 자신의 서러운 처지를 하소연했다.

"소인이 어려서 이집에 들어와 지금껏 두 분의 보살핌으로 지내온 덕에 계집을 얻어 아내로 삼고···."

권씨 부인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내 모난 말들이 급류처럼 쏟아졌다.

"그 천한 것 얘기라면 듣기 싫다. 내 그동안 알고도 모른 척 했다. 고것이 바깥양반의 허리띠를 풀게 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양물이 얼마나 부실하기에 천한 것이 주인의 속살을 만지지 못해 안달을 부렸겠느냐. 네놈이 없을 때엔 나를 대신해 사랑채를 찾아들었으니 그 토록 요망한 계집은 제 처지를 스스로 알고 목을 맨 것이다. 조금도 마음 쓸 것 없다. 이리 오너라."
"예에?"

"이리 와서 내 등이나 주물러라. 그렇잖아도 몸이 뻐근해 움직이기가 쉽지 않구나."

정길상은 얼결에 주인마님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가만 지분거렸다. 권씨가 불쑥 한 소릴 내놓았다.

"무슨 일을 하려면 강단이 있어야지. 끊고 맺음이 있어야 사내다. 허면, 네 강단은 뭐냐? 언년이란 천한 계집의 몸과 마음이 그리워질 그런 몸뚱일 가졌느냐? 자, 네놈의 손을 여기 넣어라."

권씨 부인은 사내의 손을 자신의 가슴 속에 밀어 넣었다. 희고 맑은 피부, 그곳에 우뚝 자리한 육봉은 자식을 낳지 못해서인지 한결 탄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사내의 몸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다급하게 채근했다.

"네놈이 나를 기쁘게 해준다면 언년이의 열 배 가는 계집을 얻어줄 것이다."

반드시 그런 말을 아니 했어도 정길상의 몸은 달아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서둘러 부인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날 밤 권씨 부인은 숨이 넘어갈 듯 컥컥거리더니 까무러치고 말았다.

초희가 김씨 집안에 들어오기 전 부인의 부탁을 받은 모구서는 한동안 고민했었다. 돌아가신 임철형 판관이 세상을 떠난 풍수사 가족들의 뒷배가 되어주라는 부탁이 있었고 보면, 지난날 자신이 풍수사를 살해하고 그곳에 묻은 죄는 접어두고 지금부터라도 그들이 편히 살 길을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부인의 청을 받은 다음날 나이가 동갑인 정길상을 만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자네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할까 하네. 물론 부인의 절절한 청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네만 어쨌든 이번 인연으로 잘 살아가게."

그 날 정길상은 초희와 신방을 꾸렸다. 그런데 다음날 집에 도착했을 때 엉뚱한 사단이 벌어졌다. 초희의 모습을 본 임철형이 그날 밤 자신의 처소에 집어넣으라 한 것이다. 이 일을 누구보다 분개한 건 모구서였다.

"아무리 집에서 부리는 하속배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또 다시 불행을 만들라는 것인지···. 이보시게 차라리 초희를 데리고 도망가시게. 어디 가서 이집만큼 대우를 못 받겠는가?"

그게 아니 될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구서는 다그치듯 채근했다.

"그동안 모아둔 재물이 있을 것 아닌가. 그것만이라도 두 사람 살기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니 서둘러 이곳을 떠나게. 주인 나으리가 안다 한들 어쩌겠는가. 그동안 자네의 수고를 알 것 아닌가."

"떠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겠네만, 빈 손이니 어디로 떠날 것인가. 세월이야 20년이 흘렀지만 그동안 공짜 밥에 글공부 시켜줬다고 세경 한 푼 쥐어주지 않았으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집을 떠나면 딱히 굶어죽기 십상이네."

모구서도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꺼내놓았다. 주인 나으리의 형님 되는 임철귀 어른이 살아계실 때, 남의 빚보증을 선 처가가 순식간에 망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 그때 집안일을 보던 때였으므로 모구서는 200섬의 쌀값에 해당하는 금액을 주인 모르게 빼내 처가를 도와줬었다. 이 사실을 안 임철귀는 판관으로 도임한 후,

"여러 해 전에 있었던 200섬의 쌀은 받은 것으로 할 것이니 잊어버려라."

그 고마움에 눈물 흘리며 감읍했으나 어른이 세상을 떠난 후 임철형은 그 일을 끄집어 내 묘한 농담을 곁들였다.

"내 형님은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나 200섬의 쌀이 여느 집 강아지 이름인가? 잔소리 그만 두고 하루 빨리 그 쌀값이나 변제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어느 날은,

"자네 부인의 자태가 양귀비라더니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언제건 내게 보내 빚을 탕감 받게."

이렇듯 색귀 마냥 얼러대니 모구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만 없어 안방마님 권씨의 치마폭을 들춰 못나게도 색을 밝힌 계집의 음심을 채워주고 나름대로 주인 나으리께 계집을 제공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 천만 뜻밖이었다.

"지금 나으리께서 모구서와 안방마님 권씨를 한꺼번에 엮을 생각이시니 머지않아 일이 나겠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시치미 뚝 떼고 부인의 치마폭을 들추곤 했었다. 사정이 급하다는 걸 한시도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초희를 주인 나으리의 처소로 들게 하던 날 화가 극도로 난 정길상은 다부리로 가는 길목에서 모구서를 기다렸다.

"자네가 나를 도와준다더니 주인 나으리께 내 계집을 상납하게 하는 게 도와준 것인가? 그러고도 어찌 자넬 친구라 하겠는가!"

"그렇잖아도 잘 만났네. 내가 오늘밤 일을 치를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 있게. 내가 성공하면 자넨 주인 나으리가 벽장 안에 넣어둔 함(函) 속에서 땅문서를 가져다 숨기게. 훗날 자네와 내가 만나 나누면 될 일이네. 아시겠는가."

어쨌든 주인 나으리 임철형은 칼을 맞아 비명횡사했고, 집안은 고요함 속에서 태풍전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크고 작은 원한이 깊다보니 임씨 집안의 죽음엔 잡다한 말들이 섞이어 떠돌았다. 안방마님이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느니 한양에서 온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날 밤, 장독대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던 모구서가 기찰포교에게 걸렸다. 놀라운 건 그가 쥐고 있는 게 칼이었다. 관아로 호송되자 그는 딴청을 부렸다.

"몇 해 전에 액땜을 하기 위해 장독대에 놓아둔 것인데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서 관찰사가 나서려는 걸 굳이 정약용이 막았다. 그의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액땜을 위해서라면 그 칼로 무얼 했느냐?"

"그냥 놓아뒀습니다."
"내가 보기로 이 칼엔 피가 묻은 것 같네만?"

미지근한 물로 얼마나 칼칼하게 닦았는지 모구서는 자신 있게 대꾸했다.

"피는 무슨 핍니까?"

정약용은 즉시 서리배를 불러 숯불을 피우라 명한 다음 칼을 달구었다. 벌겋게 칼이 달아오르자 준비한 고농도의 초(醋)를 붓자 치지직! 소리와 함께 칼날엔 선명하게 핏자국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모구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주섬주섬 사건에 대한 경위를 설명해 나갔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정길상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곁에서 부추기지 않았다면 어찌 주인 나으리를 살해할 생각을 품었겠습니까. 정길상을 잡아들이면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관원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집에 없었다. 주인댁 벽장에서 꺼낸 함 속엔 온갖 문권(文券) 대신 타버린 재가 한 움큼 들어 있었다. 함을 싼 보자기 안에 엉성하게 쓴 서찰 한 통이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렸다.

<재물이라는 게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이렇듯 못된 짓을 행하여 죽일 수도 있다 봅니다. 내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어찌 한시인들 편히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해서, 한이 많은 재물은 소인이 저승으로 함께 가져가려 불에 태웠습니다. 또한 이놈의 육신을 물 속에 던져 고기밥이 되게 해 지은 죄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까 합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소문이 똬리를 틀었다.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정길상을 닮은 사람을 만났다느니 다부리 강가에서 보았다느니 제전(祭田) 고갯길에서 만났다느니 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건 없었다. 지금까지···.
#추리,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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