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꼴통이 뭔가 했더니, 우리 아버지였어라"

사랑의 언어를 잃어버린 세대에 바치는 눈물

등록 2010.03.24 18:22수정 2010.03.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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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도 제법 깊은 시간이었다. 밖에서 누구 왔다고 신호를 보내는가 싶더니 "계세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마주앉아 국화차를 우려내어 마셨다.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 밤중에 어쩐 일인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스스로 가슴 속의 돌멩이를 꺼내놓을 테니까.


그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을 때의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사실 그의 얼굴이기도 했다. 웃음의 품질을 상중하로 나눈다면 하급으로 분류해야 마땅한 뭔가가 많이 부족한 그런 웃음을 그는 노상 얼굴에 달고 다녔다. 반가워도 크게 반가워하지 않고, 기분이 나빠도 크게 밖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의 부인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지난 해 추석 전에 사고를 당했으니 벌써 육 개월째였다. 고물 바이크를 타고 직장으로 가던 중 트럭에 치였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집으로 가서 시부모님 끼니를 챙겨드리고 다시 직장으로 가는 생활이 삼 년째던가, 그랬다. 그 날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다가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시간에 쫓겨 오른쪽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트럭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로 사거리로 들어섰다. 들어선 뒤에야 트럭을 의식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가 으깨지고 사지가 분절된 채로 수술, 수술, 또 수술이 거듭되기를 두 달, 석 달째 들어서야 겨우 의식이 돌아왔다. 아, 이제는 죽지 않겠구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구나. 밤이면 뜬눈으로 아내를 지켜보다가 아침이면 출근하고 직장에서 졸기를 상습범처럼 해오던 그는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집에서는 팔십 연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뇌성마비 손자에 지적 장애가 있는 또 하나의 손자.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뒤로 바보가 되어버린 사십대의 딸. 50년 사변 때 부상당하고 무공훈장 받은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오직 그것만을 밑천으로 육십여 년을 하루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큰소리만 쳐온 남편. 이 모든 조건들을 그동안 며느리와 함께 그럭저럭, 가끔은 웃음소리도 내가며 이겨내 왔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며느리가 사라져 버렸다.

고창에서는 손도 대볼 수 없는 중상이라 광주에 입원해 있는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하루에도 골백번씩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 시간 이상 집을 비우면 반드시 무엇이든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입원한 지 석 달이 되어서야 겨우 의식이 돌아와서 병원을 고창으로 옮긴 며느리를 처음으로 찾아가서 만나고 돌아온 그 날부터 어머니는 아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고추며 가지며 오이 같은 모종을 부어놓고 관리하는 틈틈이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는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알았다. 남몰래 우는 울음은 오히려 크고 또렷하게 들리는 법이어서, 어느 날 속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다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이 바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알아차리면 집안이 시끄러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모른 체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길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 또한 젊어서부터 줄곧 그렇게 살아온 까닭에 남편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제는 이력이 붙었다. 울고 싶어도, 울어야 할 일이 있어도 이를 지그시 깨무는 것으로 삭혀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정도로도 안 되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농사일을 하는 듯이 쪼그리고 앉아 흐느껴 온 것이었다.


남들은 나이가 들면 아내가 남편을 구박도 하고 그런다지만 어머니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딸자식이 결혼 실패하고 친정에 와 있는 것도 당신 탓인 것 같고, 손자들에게 장애가 있는 것도 당신 탓인 것 같아서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소처럼 묵묵히 일이나 하며 혹시라도 남편에게 턱 잡힐 일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듯이 해 왔다.

그나마 잔정 많은 며느리가 옆에 있어서 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그런 며느리가 죽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당해 버렸다. 가슴이 바싹바싹 타고, 애간장이 녹아 다 흘러 버렸을 즈음 며느리가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리고 달려가서 그 얼굴을 보았다. 서로의 눈을 보며 정도 나누었고, 말도 나누었다. 그리고 돌아온 얼마 뒤에 흐느껴 울다가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사형 선고에 준하는 진단을 내렸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과로에 영양실조로 몸이 쇠약해져서 당장은 수술도 곤란했다. 그마저도 고창에서는 안 되고 전주로 가야 했다. 아내가 광주 병원에서 고창으로 옮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어머니가 전주 큰 병원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전주 큰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저 양반이 어쩐 일인가. 아들은 뜨악해서 아버지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렇더란다.

"아 모레가 조부님 기일인디, 여그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자기 아버지의 말씀을 흉내낸 뒤에 그는 쓰게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울음보다 더 울음 같은 웃음을 흘린 뒤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수구꼴통이란 게 뭔가 했더니, 우리 아버지였더라고요.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을 가리켜 수구꼴통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물론 나도 알아요. 아버지가 정말로 어머니의 생명보다는 제사가 중요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그것이 아버지가 당신 마누라에게 할 수 있는 애정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도 그 순간에는 아버지를 와락 밀쳐 버리고 싶던지. 그런데다가 어머니는 또 농사 걱정이나 하시고 있고, 얼른 가서 고추 모종에 물을 줘야 한다나 어쩐다나. 내가 알기로는 아마 처음이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아버지가 제사 걱정을 하시니까, 어머니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는지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농사 걱정으로 잠도 못 자겠는데 제사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그 참, 나는 어머니의 수술 걱정으로 잠을 못 자겠는데 말이에요."

그는 다 식어버린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또 다시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깨물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보았던가. 울고 싶어도 울 시간조차 낼 수 없는 남자의 눈물이 밤새 천장에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을 때, 그렇게도 정신이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할 사람이 내 집에까지 찾아와서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게 고마워서 나는 눈물이 나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가. 한밤중에 사람이 사람을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은.

간밤의 일을 반추하고 있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수구꼴통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말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까닭에 엉뚱한 말로 상대를 아프게 하고 결국에는 자기도 혼자서 속상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닐까 하는. 
#수구꼴통 #사랑의 언어 #눈물 #교통사고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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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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