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통통통(通統筒)의 역사산책③] 한국전쟁 60주년

등록 2010.03.31 11:11수정 2010.04.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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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휴전협정 체결)까지, 장장 2000일이 넘도록 진행된, 그 전쟁(편의상 '한국전쟁'으로 명명)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은 잘 알면서도, 정작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은 잘 모른다. 왜인가? 그것은 6·25라는 용어로 한국전쟁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대학생 50여명에게 '6·25'라는 말을 제시하고 생각나는 대로 써보라고 했다. 학생들이 쓴 내용들을 재구성해서 보니,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기습남침을 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났다. 위기에 빠진 남한을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구해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생겨났다'라고 하는 6·25전쟁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6·25'라는 명명 방식이 어떻게 기억을 통제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6·25로 기억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일단, 우리는 왜? 전쟁이 시작한 날을 콕! 집어서 3년여의 걸친 전쟁을 기억하는지부터 짚어보자. 이승만 정권은 전쟁 당시부터 6월 25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전쟁을 규정해 왔다. 그러면 왜? 6월 25일에 초점을 맞추어 전쟁을 규정한 것일까?

 

한국전쟁 연구자인 김동춘에 따르면, '6·25'라는 규정은 한국전쟁에 관한 남한의 공식적인 인식과 국가가 국민들을 향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풀어서 말하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에 의해 전쟁이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초래된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책임으로 귀착된다는 결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6·25'라는 개념 규정 이면에는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의 구호에 집약된 것처럼 전쟁의 발발, 즉 전쟁 개시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누구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민족적 비극을 겪었는지를 두고두고 되새김질 하자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일방적인 전쟁규정은 전두환 정권 때까지 유일한 전쟁론이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그리고 '6·25전쟁론'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현재까지 언론과 교육체계를 통해 유일한 전쟁론으로 국민들에게 선전·주입되어 왔다. 1987년 6월 항쟁이후에야 민주화의 분위기를 타고 한국전쟁 연구도 활발해지면서 6·25전쟁론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남한 정부는 공식적으로 6·25전쟁론을 고수하고 있으며, 일반의 전쟁인식도 그것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6·25전쟁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6·25전쟁론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배제되어 있는데, 전쟁 통에 자행된 민간인(집단)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김동춘은 그의 책에서, (집단)학살이란 정당한 법적 절차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비무장 민간인(집단)을 일방적이고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대량 학살(genocide)은 대체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제국주의 침략과정과 냉전기 좌우 이념 갈등, 그리고 탈냉전 이후 내전과 인종 갈등 등과 결합되어 나타났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집단)학살 역시 다르지 않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학살의 가해자일 경우에는 학살의 모든 기억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다. 물론 남한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 정권은 학살문제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한국전쟁을 6·25로 규정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반공체제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가 학살문제를 몰랐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전쟁 기간에 몇 명이 학살당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만, 20만, 30만, 100만 이상 등과 같은 추정은 존재한다. 2010년 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수치는 12만8936명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학살당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통계표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홈페이지 '통계로 보는 6·25'에서 참조 ☞ http://www.koreanwar60.go.kr).

 

노무현 정부 시절에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정리한 죽음에 관한 일부의 '진실'들조차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역시,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낸 6·25전쟁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라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국가가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과 피해를 당한 쪽은 민간인들이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알려내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처럼 전화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25로 전쟁을 기억하는 한, 자신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실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과 북에는 100만이 넘는 정규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6월 25일 보다는 7월 27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휴전협정이란 전쟁을 일단 중지한다는 협정이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은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는 실질적인 첫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6월 25일에 초점을 맞춰 역사화하고 기억하는 한, 평화협정 체결의 시급성과 중대성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2010.03.31 11:11ⓒ 2010 OhmyNews
#한국전쟁 #민간인집단학살 #6.25전쟁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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