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 2
이명주
(길벗2)이 아저씨 역시 같은 숙소에서 만났다. 일본인이며 본인 말에 따르면 베트남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다.
한날 비오는 바깥 풍경에 취해 멍하니 앉았는데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고독한 사람의 절박한 표정이 읽혀 자리를 지켰다.
중국인이냐 물어서 한국사람이라 했고, 이 말을 일본어로 했더니 현지말을 하는줄 알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래서 "니홍고 데키마셍(일본어 못해요)" 하며 제지를 하니 되레 재밌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여가며 현지말과 서툰 영어를 쏟아냈다. 한마디로 집요한 사람이었다.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으니 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단 표정을 짓고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아이폰처럼 생긴 기계의 액정에서 도라에몽이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예의상 몇 번 해보고 돌려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버튼 몇 개를 꾹꾹 누르고 기계를 입에 댄 채 일본어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니 이어서 "Are you traveling(여행 중이에요?)" 하는 영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오!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컴퓨터 활용범위 90%가 타자요, 아이폰 열풍 따위 눈길도 안 줬던 아날로그형 인간인데, 언어의 장벽을 순식간에 허무는 이 문명의 이기 앞에선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는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듯 그후 한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었다.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은 게 영 아쉽던 차에 현지인 친구를 사귀면 금세 말을 익힐 수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현재 우리나라 사교육비 수준이면 차라리 저런 기계를 온국민에게 상용하시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나저나 이 기계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겠다. 혹시 한국 건가요?
(길벗3)다음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던 캐나다 청년과의 일화다. 그는 한국에서 8개월간 영어강사를 한 전력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름 몇 개와 '안녕하세요' 한 마디 외 우리말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어를 몰라도 한국에 사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며 웃는 그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이틀간 시내구경을 같이 다니면서 그는 가끔 내 앞에서 현지인을 희화화시키기도 했다. 일례로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사고 나와서는 "일본 사람들은 영어로 말하면 알겠다 답하지만 실은 못 알아들어. 방금도 커피를 달랬는데 햄버거를 주잖아" 하면서 카운터의 여직원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냈다.
어이없던 순간은 이런 그가 일본에서 강사일을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일어를 익히고 있다고 말한 때였다. 한국에선 한국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는 그가, 영어를 못하는 일본인을 놀리면서도 그 나라 말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 분명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동시에 내 발등을 내가 찧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와 마지막 만나 식사를 하던 날, 한국에 대한 인상을 솔직하게 말해달라 했다. 그러자 웃음기 가신 얼굴로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엔 무척 친절해. 하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아주 무례해져. 정말이야.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그랬으니까." 정말로 다 그런 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했다. (길벗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