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겉그림이어령의〈지성에서 영성으로〉
열림원
젊은 시절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성경에 있는 창세기를 자주 읽었던 무신론자가 있다. 하나님이 낯선 것에 제각기 아름다운 이름을 붙인 것에 감탄하여 하나님을 시인으로 이해한 시인이다. 자신도 그 하나님을 닮아 창조적인 문학작품을 써 보고픈 마음에 가끔 기도를 올린 우리시대 최고 지성인이자 연금술사다.
바로 이어령 교수가 그다. 어떻게 그가 상대자로 여기던 하나님을 절대 타자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딸이 아파하는 갑상선 암과 시력장애, 손자가 괴로워하는 정신질환이 하나님에게 다가서도록 한 것이다. 자식과 손자를 대신해 아파하거나 치료해 줄 수 없는 육신의 아버지 너머로 천상의 아버지가 치료해 준 게 그 계기였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 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밖에 없사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시고저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123쪽)이것이 하와이 원주민들이 모여든 작은 예배당에서 드린 기도였다. 이전에 교토에서 홀로 생활할 때 읊조린 무신론자의 기도와는 전혀 차원과 밀도가 달랐다. 그야말로 병이라는 고통 속에서 신이라는 광맥을 찾는 기도였다. 그것이야말로 미적단계에 머물러 있던 그가 종교적 문턱을 밟은 최초의 호소였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무신론자였던 그가 유신론자가 된 배경과 그 간격들을 단백하게 그려주고 있다. 작년에 나온 <젊음의 탄생>이나 몇 해 전에 읽은 <디지로그>와는 사뭇 다른 시성과 감성들을 발견케 된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기호학적 연상을 뛰어넘어 신을 향한 구도자의 소박함이 묻어 있다.
물론 그는 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었지만, 기적 자체가 하나님을 찾는 목적일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그것은 기복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그가 믿는 기적이란 이 세상에 단 하나, 오직 부활과 영원한 생명뿐이다.
그렇다면 영성의 문지방을 넘어선 이후, 여태 갈구해 온 지성과 이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성과 이성을 부정하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단정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성과 이성은 영성을 보완해 주는 마중물 같은 것임을 밝힌다.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152쪽) 지성과 이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영성은 신비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몸이 영을 담는 그릇이듯이, 영성은 지성과 이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영성은 지성과 이성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떠난 것은 광신이 될 뿐이다. 그런데도 여태껏 그가 영성의 문지방으로 올라서지 못한 것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라 한다.
이른바 한국교회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맹목적인 광신, 종교 우월주의적인 이기적 사랑, 채우고 쌓아 올리는 세속 욕망의 유형들이 그를 여태껏 무신론자로 주춤케 한 이유였으리라. 물론 교회를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과 개별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현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를 영성의 문턱으로 이번에 끌어올린 것도 후자였던 것이다.
아무쪼록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며 세례까지 받은 그다. 그것이 주는 무거움을 몸소 느끼는 바일 것이다. 세례란 그 몸이 물에 잠기는 의식을 뛰어넘어 영성의 수맥이 그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를 비울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 때에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관용이 충만하게 드러날 수 있으며, 그 때에만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까닭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열림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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