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96) 트라우마

[우리 말에 마음쓰기 897] '마음앓이-마음아픔-생채기'를 생각하며

등록 2010.04.11 11:08수정 2010.04.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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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트라우마(trauma) 1

.. 몸에 이상이 없다는 확신을 받는 것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나도 결국 내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정희운-너 아니면 나>(이매진,2009) 29, 106쪽


"이상(異常)이 없다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잘못이 없다는"이나 "아픈 데가 없다는"이나 "어긋난 데가 없다는"이나 "망가진 데가 없다는"이나 "틀어진 데가 없다는"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확신(確信)을 받는 것은"은 "믿음을 받는 일은"이나 "믿음 받기는"으로 손질하고, '치료(治療)하는'은 '다스리는'이나 '고치는'이나 '씻는'으로 손질하며, "출발점(出發點)이 될 것입니다"는 "첫 끈이 됩니다"나 "첫걸음이 됩니다"나 "첫 단추가 됩니다"로 손질해 줍니다. '결국(結局)'은 '어디까지나'나 '어엿하게'나 '끝내는'으로 다듬고, "내 일부(一部)라는 것을"은 "내 모습임을"이나 "내 몸임을"이나 "나와 하나임을"로 다듬고, '인정(認定)해야'는 '받아들여야'나 '맞아들여야'나 '헤아려야'나 '살펴야'로 다듬습니다.

 ┌ trauma
 │  1.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
 │  2. [C , U] 충격적인 경험
 │  3. [U , C] (의학) 부상, 외상 예문
 │
 ├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 아픔을 씻어내는
 │→ 생채기를 다독이는
 │→ 마음앓이를 다스리는
 │→ 마음아픔을 털어내는
 └ …

꽤나 많은 곳에서 '트라우마'라는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만화에 붙는 이름으로도 쓰고, 영화에 붙는 이름으로도 쓰며, 학문을 밝히는 자리에도 씁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느니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라느니 "충격적 경험 뒤의 정신적 후유증"이라느니 "외부로부터 한계량을 넘는 자극이 쇄도하여 자아의 방어막을 파열시킬 때 빚어지는 증상"이라느니 "충격적 경험 때문에 얻은 정신 장애"라느니 하는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말풀이입니다. 사람들이 '트라우마'라는 낱말을 아직 낯설어 하며 잘 알아차리지 못하니 이 낱말을 쓰는 분들은 거의 어김없이 말풀이를 달고 있는데, 모두들 '트라우마'라는 낱말 못지 않게 어렵게 말풀이를 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낱말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자리잡기에는 만만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트라우마'라는 낱말을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 낱말이 아니고는 사람들 삶과 모습을 가리킬 수 없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바깥말을 받아들이기 앞서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삶과 모습을 우리 말과 글로 가리키지 못해 왔는가 궁금합니다.

 ┌ 몸이 다치고 나서 짜증이 일어 생기는 아픔
 ├ 마음이 다침
 ├ 끔찍한 일을 겪은 뒤 얻은 마음앓이
 └ 바깥에서 지나친 자극을 받아 마음이 다침


사람들이 널리 쓰려고 하니 그냥저냥 '트라우마'라는 낱말을 받아들이며 써야 할는지, 아니면 예부터 어떻게 말하고 가리켰는가를 돌아보며 오늘날에 알맞게 새로운 낱말을 빚어야 할는지 헤아려 봅니다. 마음이 다치는 일이라 한다면 '마음다침'이거나 '마음앓이'이거나 '마음아픔'입니다. 또는 '마음생채기'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따로 '마음'이라는 낱말을 앞가지로 붙이지 않으면서 '아픔'과 '생채기'라고만 일컬으면서 '트라우마'와 똑같은 모습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때로는 '응어리'나 '딱지' 같은 낱말을 썼고요. 어느 때에는 '눈물'이나 '슬픔'이라는 낱말로 우리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다치다'라든지 '아프다'라든지 '슬프다'라는 움직씨로 우리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저 사람한테는 생채기가 깊이 나 있어요."라든지 "누나한테는 아픔이 얼룩져 있어요."라든지 "친구한테는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습니다."라든지 "어머니 가슴에 아로새겨진 슬픔을 누가 씻어 주랴."라든지 이야기할 때에 쓴 '생채기-아픔-눈물(자국)-슬픔'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즐겨쓰고 있는 '트라우마'와 매한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많이 아픕니다."라든지 "오빠는 아주 힘든 때를 보내고 있어요."라든지 "아버지는 더없이 괴로운 나날을 견딥니다."라든지 "슬펐던 일을 잊으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을 일굽니다."라든지 하는 자리에 쓴 '아프다-힘들다-괴롭다-슬프다' 같은 낱말이란 '트라우마'로 가리키려는 느낌과 이야기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하려고 하면 생각이 깊이 깃든 낱말을 일구거나 지어서 쓰는 우리들입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생각이 없는 낱말을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받아들여 쓰는 우리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 욕지꺼리를 고스란히 따라하는 모습이란 어린아이들이 욕지꺼리를 알아서 따라한다기보다 어른들이 늘 지껄이니까 익숙하거나 길들면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모습입니다. 어른들도 생각이 없고 아이들도 생각이 없는 셈입니다. 어른들 스스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말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노릇이고, 아이들 또한 저 어른은 왜 입을 함부로 놀릴까 하고 생각하면서 어른들한테 '그런 말을 쓰면 안 되잖아요?' 하고 따져야 할 노릇입니다.

'트라우마'라는 낱말을 우리 삶으로 반드시 받아들여 써야 한다면 써야겠지요. 이 낱말이 아니고서는 마음에 새겨진 생채기나 골을 가리키지 못하겠다면 어쩌는 수 없이 써야겠지요. 그러나 우리 깜냥껏 얼마든지 걸러내거나 털어내어 쓸 수 있는 우리 말과 글이 있을 때에는 우리 슬기를 빛내며 알차고 고우며 훌륭한 말마디를 빚어야겠습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과 한국말을 나누는 삶을 꾸릴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ㄴ. 트라우마(trauma) 2

.. 어떤 친구는 나한테 그런 말까지 했다. 그것이 나의 트라우마(Trauma, 마음의 상처나 쇼크), 엄마와의 관계 때문에 생긴 장애라는 것이다 ..  <유미리/김난주 옮김-물가의 요람>(고려원,1998) 20쪽

'나의'는 '내'로 손질합니다. "엄마와의 관계(關係) 때문에"는 "엄마하고 얽힌 일 때문에"로 손보고, "장애라는 것이다"는 "장애라고 한다"로 손봅니다. "마음의 상처(傷處)나 쇼크(shock)"는 "마음에 새겨진 생채기나 아픔"이나 "마음에 남은 생채기나 충격"으로 다듬습니다.

 ┌ 나의 트라우마(Trauma, 마음의 상처나 쇼크)
 │
 │→ 내 마음에 남은 생채기
 │→ 내 마음에 새겨진 아픔
 │→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슬픔
 │→ 내 마음이 받은 충격
 │→ 내 마음이 받은 생채기
 └ …

문학작품에서까지 곧잘 나타나는 '트라우마'입니다. 글쓴이는 이 낱말을 당신 문학작품에 쓰면서 묶음표를 치고 따로 말풀이를 적어 넣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 문학작품을 읽을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처음 글을 쓸 때부터 '사람들이 손쉽게 알아들을 낱말'을 골라서 쓸 노릇이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어떤 프렌드(friend, 친구나 동무나 벗)"처럼 글을 쓰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토크(talk, 말이나 이야기)"처럼 글을 쓰면 어떠할까요. 말재주를 피우는 꼴이 아닐는지요. 말자랑을 하거나 말장난을 치는 셈이 아닐는지요. 문학이란 말재주가 아니요, 예술이란 말자랑이 아니며, 인문학이나 교육이란 말장난이 아닙니다. 말로 일구는 아름다움이어야 할 문학이고, 말로 꽃피우는 열매여야 할 예술이며, 말로 이루는 빛이어야 할 인문학이나 교육입니다.

말 한 마디마다 깊은 사랑을 담아야 할 우리들이고, 글 한 줄마다 너른 믿음을 실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동무하고 주고받는 말이든 어버이하고 나누는 말이든 아이한테 물려주는 말이든 언제나 사랑과 믿음이 고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정치를 하든 법을 다루든 문학을 하든 똑같습니다. 딱딱한 말이 아닌 고운 말이어야 하고, 거짓스런 말이 아닌 착한 말이어야 하며, 엉터리 말이 아닌 참된 말이어야 합니다.

즐겁게 쓰고 즐겁게 읽는 글이 되며, 즐겁게 말하고 즐겁게 듣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운 이야기 즐거운 삶 즐거운 넋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즐거운 사람 즐거운 터전 즐거운 나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영어 #미국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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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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