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4.14 20:56수정 2010.04.14 20:56
지도를 보다 보면 우리나라 서해안에는 바다를 막은 길다란 둑인 방조제들이 유난히 많이 나있습니다. 가뜩이나 땅이 좁은데 분단까지 되었다 보니 대륙에 대한 열등감이 깊이 심어져 있어 그런가 봅니다. 전라도의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부터 경기도의 시화 방조제까지 크고 작은 방조제들이 바다를 막고 땅을 넓히면서 한반도의 지형를 바꾸고 있네요.
그 중 화성 방조제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와 우정읍 매향리 사이의 바다를 막아 건립한 방조제입니다. 약 10킬로 거리의 이 방조제길에는 갈매기들이 많이 찾아오는 정겨운 항구 궁평항도 있고, 미군의 폭격 사격장으로 쓰였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매향리 농섬도 있습니다. 유유히 창공을 홀로 비행하는 갈매기를 친구 삼아, 짭쪼름한 소금기가 배여있는 바닷바람을 마시며 애마 자전거를 타고 화성 방조제길을 달려가 보았습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노니는 정겨운 궁평항
수도권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 내리면 앞에 서신버스터미널에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400번, 400-1번). 애마 '잔차'를 접어서 버스에 싣고 종점까지 마음 편하게 갑니다. 간판 이름이 재미있는 다방들이 많은 소박한 서신버스터미널에 내려서 궁평항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달려 갑니다.
길가엔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고 있는 텃밭을 기르는 집들로 봄 기운이 완연하네요. 한가롭던 지방도로에 갑자기 차들이 붐비기 시작합니다. 갈매기도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는 궁평항에 다왔기 때문입니다. 꽤 큰 규모의 궁평항에는 수산물 직판장과 해산물 식당, 공원, 주차장이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도 찾아왔네요. 그래서 지도에도 궁평항보다는 궁평 유원지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피싱 피어라고 하는 바다 위로 길게 나있는 나무데크 낚시터도 이채롭습니다. 낚시꾼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갈매기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이 피싱 피어에 몰려 있습니다. 끼룩끼룩 저희들끼리 수다를 떨며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을 보니 바닷가에 온 것이 실감납니다.
바닷길과 호수길을 오고가는 화성방조제길
궁평항 바로 옆에는 10Km의 화성 방조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빈 군초소와 차도를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외엔 아무 것도 없는 황당그렁한 직선의 둑길을 혼자서 달려 갑니다. 언덕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무념무상에 빠져 달릴 수 있는 라이딩 코스네요. 더구나 갈 때는 바닷길을 달리고 돌아올 때는 육지화되고 있는 호수길을 지나는 특이한 곳이 방조제입니다.
바닷가쪽으로 쳐져 있는 철조망 위로 홀로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 한마리가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저 앞에서 달려오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마주치니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워 손을 들어 인사합니다. 언덕길도 아닌데 기어를 점점 1단쪽으로 내립니다. 바로 저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이지요. 바람이 어찌나 저와 자전거를 세게 껴안는지 평지에서 1단으로 겨우겨우 나아갑니다. 하긴 이 방조제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이니 바닷가의 바람과는 그 풍모가 다를 만 하네요.
바다 한가운데의 바람도 버거운데 왠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합니다. 어제 분명히 기상뉴스에는 야외활동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빗방울이 뿌리는 정도로 내린다고 하더니 예쁜 기상 캐스터의 얼굴이 갑자기 미워보입니다. 다른 곳 같으면 휴식도 할 겸 잠시 비를 피해서 있을텐데 방조제길 위에는 비를 피할 만한 건물이나 나무조차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앞에 내리는 비까지 당겨 맞으며 달려갑니다. 봄비라 그런지 흠뻑 맞아도 별로 춥지가 않아 다행이네요.
긴 방조제길 중간에 무슨 휴게소인양 배 한 척이 들어설 정도의 작은 포구가 나있습니다. 차를 개조해 만든 이동식 커피점도 있습니다. 바닷물이 빠지면 해산물을 캐와 관광객들에게 파는 동네 아주머니들도 한 두 분 계시네요. 능숙한 솜씨로 굴껍질을 까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던 중 농섬을 물어보자 수평선 위를 가리키며 저 섬이라고 하네요. 화성방조제에서 보이는 삐뚜름하게 생긴 농섬이 섬이 아닌 듯 비현실적으로 바다 위에 떠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에 맞지 않은 슬픈 마을 매향리
화성방조제를 다 건너면 만나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는 매향리는 참 이름이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그런 동네 이름에 맞지 않은 슬픈 사연이 있는데 지난 54년간 주한미군의 육상 사격장과 폭격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공군 전투기의 사격 훈련장이었던 매향리 농섬은 2005년 8월 폐쇄될 때까지 '쿠니 사격장'이란 이름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지역주민들의 사격장 폐쇄와 피해보상운동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었지요.
썰물 때면 걸어가도 닿는 거리의 가까운 섬에 폭격기들이 날아와 크고 작은 폭탄을 터뜨렸으니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와 고통을 겪었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동네의 주민대책위원회였던 건물에는 섬과 주변에서 굴 캐듯 가져온 폭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폭탄이 무슨 예술작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작은 폭탄들은 아직도 섬주변에서 계속 나와 마당에 높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수십년간이나 폭격에 무너지고 파헤쳐진 농섬의 기이한 생김새는 보면 볼수록 상처받은 주민들의 모습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저 섬과 동네의 아픔이 언제 아물고 제 모습을 찾을지, 이 땅에 언제나 평화와 통일이 꽃 필지 알길이 없는 막막한 평화만이 매향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푸줏간의 고기처럼 폭탄의 잔해를 진열한다.
갈고리에 꿰어 피를 흘리며 걸려있는 살덩이처럼 폭탄을 걸어 진열한다.
푸줏간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푸줏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매향리의 푸줏간은 탈출구가 없다, 미로다.
자반사 유리로 탈출구는 혼돈되고 은폐된다.
흥분해서 길길이 날뛴다고 길이 보일 수는 없다.
흥분할수록 폭탄의 숲에 갇히고 만다.
미아가 된다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야 길이 보인다.
찢어지고 녹슬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여기에 따꺼비가 붙었던 폭탄의 잔해들,
시체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향리의 현재의 시간은 곧 오늘의 우리 모두의 시간인 것이다.
<매향리의 시간> - 임옥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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