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숫자 '18'로 통한다

18년 유배생활에 18명 제자 양성하고 유배해제 18년뒤 생 마감

등록 2010.04.13 13:40수정 2010.04.1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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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 훗날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지어놓았다. 초당 앞 넓은 바위가 차 부뚜막인 ‘다조'다. ⓒ 이돈삼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과 다산 정약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 학자이면서 개혁적 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많은 흔적과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저서도 강진에서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생은 숫자 '18'로 통한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온 건 천주교도를 탄압했던 신유박해가 계기가 됐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게 1801년이다. 좋은 인연이든 그렇지 않은 인연이든, 필연이든 우연이든 숫자 18과의 첫 번째 인연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 동안 계속된다. 계속되는 숫자 18과의 인연이다. 숫자 18이 겹치는 1818년은 또 순조 즉위 18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숫자 18과의 인연은 강진 유배생활에서도 이어진다. 유배생활 중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던 그가 키워낸 훌륭한 제자도 윤종진 등 18명이었다.

부러 유배생활을 18년 동안 한 것도 아닐 테고, 많은 제자 가운데 18명을 골라 양성한 것도 아닐 텐데 다산과 숫자 18과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과 숫자 18의 인연은 유배에서 풀린 뒤에도 계속됐다. 1818년 유배에서 풀린 지 18년 만인 1836년 생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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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릴 날을 앞두고 강진생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 ‘정석(丁石)’. 다산초당 왼편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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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동쪽 산마루에 자리하고 있는 천일각. 다산 정약용이 이쯤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흑산도로 귀양 가 있던 형 정약전을 그렸을 것으로 상상하고 강진군에서 지어놓았다. ⓒ 이돈삼


이처럼 숫자 18과 인연을 맺은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강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산초당. 하지만 다산초당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사실. 그것은 당시 유배자가 살았던 집치고 너무 호화판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지 않은데도…. 다산초당은 그가 유배생활을 하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이었다. 다산초당은 원래 정약용의 외가 쪽인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이었다. 지금의 별장인 셈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들어와 10년 동안 생활을 한 것.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도 여기에서 남겼다.

사정이 이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유배자인 정약용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정약용의 호 '다산(茶山)'도 초당 뒷산의 다른 이름인 다산(茶山)에서 따온 것이다. 다산초당은 낡아 붕괴됐던 것을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복원하고 나중에 다산의 거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면서 기와를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산 정약용은 기와집에서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에 근거해 한때 기와집을 헐고 초가로 다시 지어야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실제 지난해 정부예산에 초가 신축비용이 반영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없던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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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백련사 혜장 스님을 만나러 다니던 숲길. 다산은 이 길에서 스님과 만나 유학과 불교를 논하고, 차와 세상을 얘기했을 것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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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 옆에 자리하고 있는 차밭. 다산초당 뒷산에는 예부터 차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진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 이돈삼


이 다산초당에는 정약용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가 마시던 샘물인 '약천'을 비롯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차 부뚜막인 '다조'가 눈에 띈다. 네모진 연못을 파서 그 안에 자연석으로 둥근 섬을 만들고 홈통으로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도 초당 오른편에 있다. 유배에서 풀릴 날을 앞두고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바위에 새긴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도 있다.

다산초당 동쪽 산마루에 천일각도 있다. 사실 천일각은 당시 없었던 누각이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이쯤에서 틈틈이 바람을 쐬고, 흑산도로 귀양 가 있던 형 정약전을 그렸을 것이라 생각해 1975년 강진군에서 지어놓은 것이다. 그럴지라도 천일각에 서서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멋도 괜찮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숲길에도 그의 흔적이 묻어있다. 다산은 그 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 스님을 만났다. 다산은 이 길에서 스님과 만나 유학과 불교를 논하고, 차와 세상을 얘기했다. 천태종이 불교 개혁운동의 하나인 백련결사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유명해진 백련사는 지금 사찰보다 동백숲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다산과 혜장스님이 만나던 이 길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길이 1㎞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비교적 평탄해 남녀노소 걷기에 부담이 없어서다. 연인끼리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며 걷기에 제격이다. 혼자서 호젓하게 걸으며 사색하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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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 동문매반가의 골방이었던 사의재. 다산은 이곳에 유배봇짐을 풀고 4년 동안 살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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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 동문매반가의 주인 할머니와 딸. 다산 정약용이 유배봇짐을 풀 수 있도록 골방을 내어준 은인이다. 사의재 뒷편에 동상으로 서 있다. ⓒ 이돈삼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강진생활 중 처음 4년을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보냈다. 이후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 집에서 2년씩 생활했다. 그리고 다산초당에서 10년을 살았다. 다산이 처음 발길을 한 동문매반가는 주막집이다. 다산은 이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유배봇짐을 풀고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았다.

이 골방 이름이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란 생각과 용모, 언어, 동작 등 네 가지를 올바로 한 이가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이다. 다산의 저서 가운데 '경세유표'가 여기에 머물 때 나온 것이다. 동문매반가와 사의재 모두 지난 2007년 복원됐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사의재는 강진읍에 있다. 강진은 서해안고속국도 목포나들목에서 1시간여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에서 2번국도를 이용해 강진읍으로 가면 된다. 여기서 완도방면 군도 2호선으로 갈아타고 10분쯤 가면 왼쪽으로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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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 동문매반가에서 내놓은 동동주와 매생이전. 동문매반가에서는 현대판 주모가 손님들에게 술상과 밥상을 차려준다. ⓒ 이돈삼

#다산 정약용 #다산초당 #사의재 #강진 #동문매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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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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