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 훗날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지어놓았다. 초당 앞 넓은 바위가 차 부뚜막인 ‘다조'다.
이돈삼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과 다산 정약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 학자이면서 개혁적 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많은 흔적과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저서도 강진에서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생은 숫자 '18'로 통한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온 건 천주교도를 탄압했던 신유박해가 계기가 됐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게 1801년이다. 좋은 인연이든 그렇지 않은 인연이든, 필연이든 우연이든 숫자 18과의 첫 번째 인연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 동안 계속된다. 계속되는 숫자 18과의 인연이다. 숫자 18이 겹치는 1818년은 또 순조 즉위 18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숫자 18과의 인연은 강진 유배생활에서도 이어진다. 유배생활 중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던 그가 키워낸 훌륭한 제자도 윤종진 등 18명이었다.
부러 유배생활을 18년 동안 한 것도 아닐 테고, 많은 제자 가운데 18명을 골라 양성한 것도 아닐 텐데 다산과 숫자 18과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과 숫자 18의 인연은 유배에서 풀린 뒤에도 계속됐다. 1818년 유배에서 풀린 지 18년 만인 1836년 생을 마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