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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냥 한쪽면에 오스카 와일드의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지해 세상에 편안하게 지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송성영
"어? 이거 우리 고향에서 만든 거네."
논산이 고향인 이종수씨가 식탁 위에 놓여 진 화랑 성냥을 들어 올려 보입니다. 요즘 보기 드문 통성냥이었습니다. 통성냥을 둘러보니 옆면에 아일랜드의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가 썼다는 글귀가 어색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지해 세상에 편안하게 지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 힘겨운 노동 끝에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노동의 신성함을 되새기게 하는 글귀였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서 몸 하나를 밑천 삼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편안하게 살 틈이 별로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편안한 세상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통해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뒤끝에서 오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그 글귀를 읽게 돼서 그런지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있는 글귀처럼 다가왔습니다.
윤구씨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돈께나 있는 사람들의 번듯한 주택을 지어주고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아주 못된 집주(목수들은 집주인을 '집주'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들은 아예 임금을 떼먹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 집 짓는 공사 현장에서만 그러겠습니까? 산업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힘든 노동력을 착취한 그들은 번듯한 집에 눌러 앉아 목구멍으로 밥알을 넘기겠지요. 다른 사람들의 땀으로 가만히 앉아 밥알을 넘길 수 있는 그 놈의 목구멍들이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글세방에 돌아오면 목수들은 차례대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가벼운 전신 운동을 합니다. 하루 종일 힘들었던 근육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땀 흘리는 사람들은 부러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보 목수인 성훈씨를 제외하고 모두들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이었습니다.
목수들은 하루의 피로를 샤워를 통해 개운하게 날려 보내고 가족들과 안부전화를 합니다. 대전에서 생활하는 이종수씨는 17개월 된 아들이 있다는데 거의 매일 밤마다 영상통화를 하기도 합니다.
더러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더러는 텔레비전을 시청합니다. 마침 사글세방에는 유선 케이블선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글세방 할머니 말로는 예전에 서너 달쯤 사글세를 살다갔다는 약장수가 설치해 놓았다고 합니다. 여러 편의 영화 파일이 담겨져 있는 윤구씨의 노트북은 텔레비전 역할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집 짓는 현장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는 목수들을 위해 텔레비전까지 시청할 수 있는 노트북을 장만한 것이었습니다.
체력 좋은 윤구씨는 공사 현장에서는 팀원들을 이끌어가며 일머리를 척척 진행해 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팀장이지만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으면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 됩니다. 그는 노트북에 영화와 함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저장해 놓고 즐겨 보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나 드라마를 보게 되면 영락없이 말 많은 노인네가 되기도 합니다.
"저런 정치하는 인간들을 순 사기꾼이라니...""어이구 저 여자가 다 알고 있는데, 거기 숨어 있다고 모르나?"강원도 두메산골이 고향인 그는 구수한 사투리를 뒤섞어 혼잣말로 중얼 중얼거리며 텔레비전과 대화를 합니다.
나는 체력 좋은 윤구씨 옆댕이에 누워 늦은 시간까지 영화를 보다가 가물가물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신기하게 다가왔던 것처럼 작은 화면 안에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영화 속에 큰 집이 보이고 큰 거실이 보입니다. 내가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사람 사는 데 고래등 같이 큰 집이 뭔 소용이 있는가? 그저 빗물 새지 않고 등 따숩고 배부를 수 있는 집이 있으면 그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다가 곤하게 잠에 떨어집니다. 어째튼 그날, 목수들의 노동력에 비하면 새 발에 피에 불과했지만 노동을 했기 때문에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집 자리에 콘크리트가 굳는 시간을 이용해 목조건물 틀을 짜기로 했는데 목재가 도착하지 않아 하루 일을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목수들은 고흥 곳곳을 둘러보기 위해 유람을 나섰고 나는 바다낚시를 나서기로 했습니다. 집 짓는 동안 목수들에게 횟감을 마련해 주겠노라 큰 소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낚시 미끼를 사기 위해 도화면으로 나섰는데 때마침 장날이었습니다. 도화면에는 3일과 8일, 전통오일장이 서고 있다는데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장터 분위기는 한가했고 장에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해산물들이었습니다.
3, 8 오일장을 기억해 두기 위해 화투패 두 장으로 끗발을 가리는 '섯다 판'의 삼 팔 따라지를 대입시켰습니다. 끗발 좋은 '삼 팔 광땡'이 아닌 '삼 팔 따라지'. 육이오 민족 전쟁 당시 이북에서 이남으로 피난 온 사람들을 끗발 없는 '삼 팔 따라지' 인생이라고 했었습니다. 돈도 빽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도 빽도 없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흥 땅에 집 한 채 달랑 짓고 빈손으로 정착하려 하는 내 처지가 그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집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싸가지 없는 생각이지만 더 이상 나빠질 일이 없을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