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97) 시작 4

[우리 말에 마음쓰기 902] 눈보라가 시작, 뉴스가 시작, 하루를 시작

등록 2010.04.20 17:21수정 2010.04.2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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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눈보라가 시작된 다음부터

 

.. 눈보라가 시작된 다음부터 밖에 나가지 못했다. 여덟 달 전에 숲으로 가출한 뒤 처음으로, 심심하다고 느껴진다 ..  <진 C.조지/김원구 옮김-나의 산에서>(비룡소,1995) 20쪽

 

"여덟 달 전(前)에"는 "여덟 달 앞서"로 손보고, "숲으로 가출(家出)한 뒤"는 "집을 나와 숲으로 온 뒤"나 "숲으로 떠나온 뒤"로 손봅니다. "심심하다고 느껴진다"는 "심심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손질해 줍니다.

 

 ┌ 눈보라가 시작된 다음부터

 │

 │→ 눈보라가 일어난 다음부터

 │→ 눈보라가 몰아친 다음부터

 │→ 눈보리가 친 다음부터

 └ …

 

눈보라는 '칩'니다. 또는 '몰아칩'니다. 여태껏 조용하다가 갑작스럽게 눈보리가 친다고 할 때에는, 또는 겨울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치는 눈보라라고 할 때에는, "눈보라가 처음 온 다음부터"나 "눈보라가 처음 몰아친 다음부터"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어쩌면 "바람이 시작된다"라든지 "비가 시작된다"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람은 '불'고 비는 '오'는데, 옳고 바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자꾸자꾸 줄어드는구나 싶어 걱정입니다.

 

 

ㄴ. 뉴스가 시작

 

.. 7시 뉴스가 시작했다. 이제 곧 엄마가 올 것이다 ..  <스에요시 아키코/이경옥 옮김-별로 돌아간 소녀>(사계절,2008) 7쪽

 

"엄마가 올 것이다"는 "온다"나 "올 테지"로 손질해 줍니다. 또는, "엄마가 올 때이다"로 적어 봅니다.

 

 ┌ 7시 뉴스가 시작했다

 │

 │→ 일곱 시 뉴스가 나온다

 │→ 일곱 시 뉴스가 한다

 └ …

 

아이는 어머니가 오는 때를 손꼽으며 기다립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립니다. 시계를 보며 기다릴 수 있고 책을 읽으며 기다릴 수 있으나, 마음이 타니 텔레비전을 켜 놓고 기다립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 풀그림 저 풀그림이 흐릅니다. 이윽고 일곱 시가 됩니다. '일곱 시에 맞춰서 나오는 새소식'을 보고 알아차립니다.

 

 ┌ 이제 하는구나. 조용히 보자 (o)

 └ 이제 시작하는구나. 조용히 보자 (x)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을 때, 연극을 보러 공연장에 갔을 때, 또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 놓고 볼 때, 우리는 언제 '막이 오르나' 기다립니다. 얼마쯤 기다리고 나서 비로소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지켜봅니다.

 

 ┌ 언제 하려고 저렇게 뜸만 들이나 (o)

 └ 언제 시작하려고 저렇게 뜸만 들이나 (x)

 

처음과 끝, 앞과 뒤, 머리와 꼬리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 삶에 '시작'이라는 말이 스며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도, 동무들하고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볼 때면 으레 "야! 이제 한다!" 하고 소리지르며 목이 빠져라 들여다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3년까지,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다고 하던 2000년까지도 둘레에서 나이든 이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한다'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 공부를 찬찬히 밟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 지식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어김없이 '한다'라는 말은 못 듣고 '시작한다'라는 말만 듣습니다.

 

 ┌ 아직 하려면 멀었나 (o)

 └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나 (x)

 

누군가 1960년대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고 할 때, 1930년대 이야기를 보여주는 연속극을 찍는다고 할 때, 1890년대 우리 역사를 살피는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자기가 지금 쓰는 말씨만을 헤아려 '시작한다'라는 말마디를 끼워넣으면 옳지 않습니다. 잘못입니다. 그때 여느 사람들한테는 '시작'이라는 말마디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사람들이 "식사하셨어유?" 하고 물어 보도록 글을 써도 옳지 않습니다. "진지 드셨어유?"나 "진지 자셨어유?" 하고 물어 보도록 글을 써야 옳습니다. 또는 "밥은 드셨어유?"처럼 쓰거나.

 

사극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연속극 대본을 쓰는 분들이, 조선이나 고려 때 임금 입에서 '역할' 같은 말이 튀어나오도록 글을 쓴다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요. '상태' 같은 말이 튀어나오도록 글을 쓰거나 '존재'라는 말이 튀어나오도록 글을 써도 참 형편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입으로는 이와 같은 낱말을 떨어뜨릴 수 없고, 떼어낼 수 없다고 하지만, 지난날 자취를 돌아보는 문학이나 역사에서는 하나도 어울릴 수 없는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헤아린다면,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우리들한테는 우리 삶을 담아내고 우리 얼과 넋이 깃든 고즈넉한 말이 있습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이 고즈넉한 말을 내동댕이쳤을 뿐입니다만.

 

 

ㄷ. 하루를 시작한다

 

.. 이곳 대장간은 오전 7시쯤이면 벌써 하루를 시작한다. 부지런히 아침을 시작하는 모습은 농사꾼들을 닮았다 ..  <김대홍-그 골목이 말을 걸다>(넥서스BOOKS,2008) 151쪽

 

'오전(午前)'은 '아침'으로 고쳐씁니다. '열심(熱心)히'라 하지 않고 '부지런히'라 적은 대목은 반갑습니다.

 

 ┌ 하루를 시작한다

 │

 │→ 하루를 연다

 │→ 하루를 맞이한다

 └ …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과 나무든, 모든 목숨붙이는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을 맞이합니다. 아침은 열고 저녁은 닫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저녁에 눈을 감습니다. 돌고돌며 고이고이 이어오는 하루하루는 열렸다가 닫힙니다. 낮에 하루를 열어 늦은밤까지 지새우는 이가 있고, 새벽에 하루를 닫고 밤에 하루를 여는 이가 있습니다. 여는 때는 다르지만 모두 한마음입니다. 저마다 스스로 즐거울 일감을 찾고, 저마다 스스로 반가울 놀이감으로 마음과 몸을 쉽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4.20 17:21ⓒ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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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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