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간 갈등이 이념대립과 결합해 상호 보복살해"

[끝나지 않은 사변]1951년 '고창 월림 사건'은 확대재생산중

등록 2010.05.30 16:17수정 2010.05.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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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여기서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권력은 언제나 가진 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한편 서민들의 지지를 먹고 자란다는 역설을 굳이 상기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신분제 사회를 퇴출시킨 이후 기득권자들의 귀족의식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 강화된 귀족의식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온갖 법령들이다. 법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정되었지만 민중 자신은 언제 무슨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2,3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별나게 완고한 어른들 사이에서는 천,방,지,축,마,걸,피라 해서 그러한 성씨를 가진 사람을 상놈이라고 한 자락 깔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새로이 성을 받았거나 스스로 만든 가문은 물론 천,방,지,축,마,걸,피뿐만이 아니다. 어쨌든 이들 성씨의 가문들은 성이 없었을 때보다도 오히려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는 여인처럼 성씨 자체가 나는 상놈이요, 천민이요 하는 증거로 작동되었다.

때문에 조선일보의 방씨 가문처럼 특출한 전략으로 짧은 기간 동안 사회의 주류로 진입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적한 곳에 따로 씨족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생계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니 화전을 일구거나 과거에 주인이었던 양반네들의 논밭에서 날품을 팔았다.

고창 월림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나?

          동학농민 혁명군이 최초로 죽창을 깎은 곳이 무장에 있다. 월림 마을 앞쪽으로 혁명군 진격로가 있었다. 지금은 관에서 이를 기려 홍보하고 있다.
동학농민 혁명군이 최초로 죽창을 깎은 곳이 무장에 있다. 월림 마을 앞쪽으로 혁명군 진격로가 있었다. 지금은 관에서 이를 기려 홍보하고 있다. 김수복

고창 월림 마을의 천씨들은 그러한 점에서 모범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월림 마을은 도로의 끝이고, 골짜기의 끝이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도로는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이고, 좌우사방을 둘러봐도 농지라 할 만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다랑이논 몇 뙈기와 산비탈의 자갈밭 몇 뙈기가 고작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화전을 일구고 개간을 했어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죄인처럼 숨을 죽이고 살았던 것이다.

고창의 무장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이나 빈부격차가 심했고, 빈민들의 기성질서에 대한 반감 또한 깊었다. 이러한 반감이 일제를 거치는 동안 더러는 완화되고 더러는 잠복해 있다가 해방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좌익과 연계된 측면이 있다. 땅 없는 자에게 땅을 주고 식구 수에 따라 양식을 준다는데 귀가 솔깃하지 않는 사람 몇이나 있으랴.

어쨌든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도 월림의 천씨들은 열심히 품팔이를 했고, 한푼 두푼 어렵게 모은 품삯으로 인근 마을의 땅을 조금씩 사 들였다. 초기 예비군가에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자는 내용이 있는데 그들의 삶이 꼭 그와 같았다. 실제로 마을의 젊은이들 몇몇은 좌익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모임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내 땅이 생겼다' '나도 이제 땅 주인이다'하는 기쁨 속에서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들이 한 뙈기 두 뙈기 조금씩 사 들인 땅의 옛 주인은 누구였던가. 반상의 구별이 있었던 시절에 멀리서도 그림자만 보이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양반들이었다. 하인을 살던 시절의 옛 주인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그런대로 관계도 괜찮았다. 옛 주인이 "그놈 제법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하고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천씨 일가의 딸들이 옛 주인 댁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월림리 천병구씨의 전북도의회 조사단 증언).

        도로의 끝이고 골짜기의 끝인 월림 마을 진입로. 농지는 사진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다. 버스도 없어서 시장에 나간 할머니는 한나절을 걸려야 집에 들어올 수 있다
도로의 끝이고 골짜기의 끝인 월림 마을 진입로. 농지는 사진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다. 버스도 없어서 시장에 나간 할머니는 한나절을 걸려야 집에 들어올 수 있다김수복

양반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극소수 양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양반들이 굶어 죽을지언정 정강이를 내놓을 수는 없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자제들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었다. 자제들은 대개 공무원이거나 경찰이거나 조합 같은 금융기관에서 일을 했다. 일제 때도 그랬고 해방 뒤에도 그랬다. 관직의 최말단이라고 하는 면서기까지도 대부분 과거의 양반댁 자제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양반댁의 농사는 머슴을 들이거나 소작을 놓았다.


머슴을 들이거나 소작을 놓거나 내 손으로 하지 않는 농사가 매년 풍년일 수는 없었다. 흉년이 들면 일부 양반들은 땅을 내놓았다. 서울이나 전주 혹은 광주에서 공부하는 자식들의 유학비용 때문이었다. 이 땅을 학교 공부와는 무관하게 그저 그야말로 버러지처럼 일만 해온 천씨 일가에서 사 들였다. 이렇게 땅을 사 들이다 보니 급기야는 양반댁 혹은 옛 주인의 마을 앞 문전옥답까지 천씨 일가의 차지가 되었다.

과거의 양반들이 어느 날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는 "어허 이런"하고 있을 즈음 이승만의 주도하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다. '좌익은 불법이다'가 그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좌우익이 가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했어도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지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과거의 양반들은, 옛 주인들은 날개를 달았다.

어느 하루 천씨 일가가 몰려 사는 월림과 죽림 두 마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마을이 형성된 이후 단 한 명의 경찰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첩첩산골에 수십 명의 총 든 경찰이 몰려왔다. 힘깨나 쓸 만한 젊은이는 모조리 잡혀갔다. 잡혀간 젊은이들은 각목에 머리가 깨지고 이가 부러지고 손발이 뒤틀리는 등 반신불수가 되어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옛 양반댁으로 몰려가 처형... 경찰 들이닥쳐 총살

        무장 월림 마을 입구
무장 월림 마을 입구김수복

그리고 얼마 뒤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사리 때의 밀물처럼 거침없이 내려왔다. 경찰은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에 기력을 회복한 월림 마을의 몇몇 젊은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사촌격인 이웃 죽림마을 젊은이들과 함께 밤길을 나섰다. 자신들을 그토록 고문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옛 양반댁으로 몰려갔다. 음력으로 1950년 9월 20일 밤 10시쯤이었다. 군인이거나 경찰이거나 혹은 금융기관(현농협) 관계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악독'하다고 그들 스스로 판단한 가족 5가구를 골라 새끼줄로 묶어놓고 처형을 했다(용전리 신점수씨의 전북도의회 조사단 증언).

그로부터 7개월 뒤인  1951년 5월 10일, 전북경찰국 제18전투경찰대대 제3중대 병력 전원이 월림, 죽림 두 마을을 습격했다. 지휘관은 김모씨로, 옛 양반댁 자제 가운데 한 명이었고, 정황상 복수를 다짐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마침내 자신의 작전 관할구역이 무장 인근 시목동으로까지 좁혀졌을 때, 그는 휘하 병력을 동원해서 월림, 죽림 두 마을의 남자는 물론이고 젖을 빨던 어린아이와 그 엄마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2킬로 떨어진 자신의 작전구역인 시목동으로 끌고가서 총살을 했다.

죽어서도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와 아이는 여자와 아이들끼리 그렇게 따로 모아놓고 죽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피해자들을 굳이 2킬로미터나 떨어진 자신의 작전구역 안으로 끌고가서 죽였다는 점이다. 이는 피해자들을 순수한 양민이 아니라 공비와 그 가족들로 둔갑시켜 상부에 보고할 목적이 아니었나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 곳간 한 칸의 전형적인 시골집. 새마을운동 영향으로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기는 했지만 완전히 흙집이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 곳간 한 칸의 전형적인 시골집. 새마을운동 영향으로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기는 했지만 완전히 흙집이다. 김수복

아무튼 그로부터 56년 뒤인 2007년 11월에 정부 공식 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문을 내놓았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성씨간 갈등이 이념적 대립과 결합해 상호 보복살해의 양상으로 발전된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객관적 차원에서 보면 무장 군경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분하에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으로 지휘관의 불법적인 공권력 남용 사실이 명백하다."

 "상급자인 제18전투대대 대대장과 전북경찰국 지휘 계통이 이 사실을 보고받고도 3일 동안 은폐한 데다 중대장 김씨에 대한 사법처리 외에는 희생자 및 유가족 위로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 국가 차원의 피해자 명예회복 조치 ▲ 비상상황시 군ㆍ경에 의한 민간인 불법살해를 막을 수 있는 보호법안 제정 ▲ 사건 당사자인 김씨와 천씨 일가의 화해를 위한 정부ㆍ지자체의 위령사업 및 지원방안 마련 등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진실, 화해 위원회의 결정문은 성씨간에 이루어진 복수극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 복수극의 원인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었다. 공무를 빌미로 개인적인 감정풀이를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일 뿐이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 세금을 내는 국민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살해한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진실, 화해 위원회의 결정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별 말이 없었지만 은밀하게 또 하나의 복수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월림, 죽림 두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 화해 위원회의 결정문은 면죄부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방울의 눈물이었다. 비로소 공포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혼자 남몰래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왜 우느냐고 물으면 이러저러해서 운다고 말해도 괜찮게 되었다. 그렇게 울었다. 남몰래 울지 않고 떳떳하게 울었다.

읽어버린 10년의 정체는 국민의 불안과 공포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말씀 좀 해달라는 요청에 먼 산을 바라보는 할머니. 한참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우리는 암시랑토 안 했어라. 한 사람도 안 죽었어. 친척도 안 죽었어. 죽은 사람이 없는디 뭔 말을 혀. 긍게 쩌그 아랫집에나 가보시던가 어쩌던가, 알아서 하시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말씀 좀 해달라는 요청에 먼 산을 바라보는 할머니. 한참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우리는 암시랑토 안 했어라. 한 사람도 안 죽었어. 친척도 안 죽었어. 죽은 사람이 없는디 뭔 말을 혀. 긍게 쩌그 아랫집에나 가보시던가 어쩌던가, 알아서 하시요"김수복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보이지 않는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론에 인터뷰한 사람 집에 괴전화가 걸려왔다. 이 집에도, 저 집에도,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숨소리만 거칠게 씩씩거리다가 끊는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그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그 어떤 협박의 목소리보다도, 그 어떤 최후통첩보다도 간담을 오그라들게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급기야는 전쟁을 암시하는 대통령의 담화가 백주대낮에 발표되었다. 아, 세상이 다시 60년 전으로 돌아가 버렸는가. 지금 월림, 죽림 두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60년 전에 있었던 학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기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니 스스로 묻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자건 누구건 낯선 손님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암시랑토 안 했어라. 하나도 안 죽었어. 친척? 친척이 뭐 죽을 일 있었간디. 야튼간에 나는 몰라여. 쩌그 아랫집에나 가서 물어볼라면 물어보시던가, 하여튼 나는 모른게."

아랫집에 가서 물어보면 윗집으로 가라 하고, 윗집으로 가면 다시 아랫집으로 가라 한다. 할머니에게 여쭤보면 젊은 사람들 기억이 좋으니까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고,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찾으라고 한다. 여기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순간적으로 눈에 흰자위가 몰리면서 진저리를 치다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대며 외면을 하는 것이다.

아, 이것이었던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그토록 애통해 했던 그 잃어버린 것의 정체가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 바로 그것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잃어버린 십 년이라는 한탄 속에 우리의 현대사가 역설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48년 정부 수립 이후 단 10년을 제외하고 자그만치 60년을 신분적으로 상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해 왔다. 그 동력이 바로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 거기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눈치 보기와 복종 그리고 비굴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1994년 전북도 의회 <6,25양민학살 진상실태조사 보고서>및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고창 월림 사건> 결정문.
#고창 월림 사건 #잃어버린 10년 #끝나지 않은 사변 #더러운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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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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