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34)

보석 같은 존재

등록 2010.06.17 11:06수정 2010.06.1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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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여자 .
밤과 여자.일러스트 - 조을영

34. 보석같은 존재

"색상이 변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죠? 어떤 작은 감정을 계기로 인간의 감정이 순식간에 변해서 선인이 악인이 되고, 그 반대로 악인이 천성을 바꾸어서 새 삶을 사는 것처럼 이 술의 색깔도 금방 하나의 변화 과정을 거쳤어요. 그 맛이 얼마나 마음을 감동시킬지는 모르지만 이미 하나의 인생을 건너간 셈이죠. 그것만으로도 칭찬 받아야 할 일이고, 맛이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인 거예요."


페르도는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며 불빛에 비추었다.

"마셔봤어요?"

조제가 심통스럽게 말했다.

"술은 이제 며칠 지나면 변화 과정을 알아볼 수가 있겠죠. 식물업자가 유언장에서 말하길 독성은 독으로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생명체가 지닌 본연의 순수함에 숨어있는 해독작용을 극대화시켜서 그 독성이 차분히 가라앉길 기다리는 끈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는 그 일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사람이죠. 인간이란 존재와 악의 본연, 선의 근본 같은 것에요. 그가 사랑하는 꽃을 통해서요."

페르도는 앉아있는 우리들을 조용히 바라다 보며 말했다.


"그러면 잘못 제조된 분노의 술…그 술의 원료는 누구의 분노였길래 죽어서까지도 이렇게 원한이 맺혀야 하는 거죠?"

나는 메마른 목에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페르도는 의자를 당겨서 앉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일기장, 다시 말해 우리가 어제 오늘에 걸쳐 방송으로 촬영하고 있는 이 토크쇼 주인공의 분노지요. 그녀에게 가해졌던 독성은 광장한 전파력으로 맹독성을 뿜어냈고, 그녀는 죽음으로써 진실을 밝히고 싶어했지만 그 독성은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녀를 해한 자들은 그 잘못을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을 이 술로써 꺼내보고 싶은 거지요."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 봤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여전히  때에 절은 전등이 아스라히 매달린 채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그건 마치 숨기고 싶은 본능을 강제로 강탈당한  것처럼 원망이 깃든 차가움이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우리가 삶이 힘들다고 여기는 이유는 시선을 너무 멀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에 당도한 것을 유심히 바라봐요.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 꽃조차도 언제 꽃이 필지 모르는 데 무엇 때문에 길고 긴 인생의 열매를 애타하고 그리워하는 거죠? 지금 현재를 바라보고 있으면 미래란 것은 어느틈에 다가오는 것 아닐까요?"

그 틈에 보이지 않던 피디가 조금 상기되고 들뜬 얼굴로 우리들 곁으로 왔다. 그를 따라서 쫄랑거리며 다가온 꼬맹이는 뭔가를 먹다가 쫒아왔는지 그 얼굴에 묻은 소스 자국이 선연했다. 하지만 그걸 알려줄 새도 없이 우리는 피디에게 각자 하나씩 손목을 잡힌 채로 앞쪽으로 걸어나가야 했다.

지난번에 악단이 연주하던 곳에 촬영 무대를 만들어 놓고 모두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구석에서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고,'빨간 하이힐'은 과감하게 세로로 한쪽 옆선이 치마단 끝에서부터 허리까지 터진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무대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연예인이었다면 '저 치마 안에 속옷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로 왈가왈부하며 한동안 소동이 생길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육중한 다리와 몸매는 주위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고, 이를 황홀히 바라보던 피디는 카메라맨에게 지시를 내리고 차트를 넘기며 얼굴에서 용기와 자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대단한데요?"

조제가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페르도는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밤이란 대상이 그녀를 용기있게 만들어준 거지요. 낮은 이성의 시간이고 남과 똑같은 것을 강요받는 되풀이의 시간이죠.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박탈당하기도 하면서요.

하지만 밤은 일종의 검은 보석함과 같아요. 낮 동안에 미뤄왔던 일들을 이 소중한 시간에 하는 거죠. 연인을 만나고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발산해 보기도 하고, 오늘 그녀는 자신의 정해진 룰을 벗어나서 과감한 의상으로 감정을 표출했군요. 밤이 그 용기를 만들어줬어요.밤 안에서 우린 하나의 보석인 셈이지요. 각자의 태어난 시기와 세공법이 모두 다른 보석들, 그러기에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그 아름다움은 각자 존경받을 만하지요."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구석 쪽에 앉아있는 흰갈매기에게 시선이 갔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은 선연한 고통의 그림자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오래전의 기억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 방학의 오후, 동네는 적막감에 절어있고 너무나 조용하다. 가끔씩 매미 소리만이 나무 위에서 울려퍼질 뿐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삶의 권태에 찌든 사람들은 자신 외에는 어느 것에도 이렇다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1층에 가게가 딸린 어느 건물 8층에서 한 남자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며 담배를 씁쓸히 피우더니 그 담배가 다 타들어 가고 마지막 한 모금의 연기가 하늘로 사라질 즈음 그는 조용히 창문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가 몸을 던지는 광경은 내 눈에 선연히 박혔고, 나무의 깊은 그늘이 만들어내는 오후의 그림자 속에서 거미 한마리가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환영을 보았다. 그 거미는 8층 그의 집에서 뻗어나와서 지독히도 길고 오랫동안 선명한 붉은 다리를 움직여서 길바닥의 그의 곁에 당도했고,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듯하더니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그날의 그 남자의 모습을 흰갈매기를 통해서 지금 지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거미의 환영을 통해 열망사냥꾼의 희미한 형상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흰갈매기에게도 열망사냥꾼과 관련한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습격된 마음 .
습격된 마음.일러스트 - 조을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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