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99) 프라이

[우리 말에 마음쓰기 927] '나이트 스쿨'과 '밤학교' 사이

등록 2010.06.11 12:01수정 2010.06.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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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나이트 스쿨

..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맨땅에 앉아 칠판을 마주하고 빙 둘러앉은 아이들. 책상이나 의자는커녕 하늘을 가릴 천막도 없이 밤하늘 아래 등물 하나를 밝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 그것이 나이트 스쿨이었다 ..  <이매진피스 임영신,이혜영-희망을 여행하라>(소나무,2009) 407쪽


'의지(依支)해'는 '기대'로 다듬고, '의자(椅子)'는 '걸상'으로 다듬어 줍니다. "가르치는 곳, 그것이"는 "가르치는 곳이 바로"나 "가르치는 곳, 이곳이 바로"로 고쳐씁니다. 이러한 글을 쓰고 싶다면 쓸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글투는 영어 말투이지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 night School : x
 ├ 야학(夜學)
 │  (1)밤에 공부함
 │  (2) [교육] '야간 학교'를 줄여 이르는 말
 │   - 야학을 열다
 │
 ├ 그것이 나이트 스쿨이었다
 │→ 이곳이 야학이었다
 │→ 이곳이 밤학교였다
 │→ 이곳이 밤배움터였다
 └ …

나라밖으로 공정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몸소 겪었다는 '나이트 스쿨'을 이야기하는 대목을 책으로 읽다가 한동안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야학'이라고 이야기해 왔는데, 1960∼80년대에 우리 나라로 공정여행을 왔을 나라밖 사람들은 한국땅에서 펼쳐지던 '야학'을 일컬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을까 하고.

나라밖 사람들은 한국땅 사람들이 밤을 잊은 채 가르치고 배우는 뜨거운 가슴들을 바라보며 'ya-hak'이라 이야기했을까요? 'night School'이라 이야기했을까요?

나라밖 어느 곳에선가 이루어진다는 '나이트 스쿨'이란 이곳 아이들과 교사가 붙인 배움터 이름일는지, 아니면 그냥 영어로 우리들이 일컫는 이름일는지 궁금합니다. 나라밖 어느 곳에선가 열린 배움터에 붙은 이름이 '나이트 스쿨'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고유명사로 여겨야 마땅할는지, 이와 같은 배움터 이름은 '야학'이라든지 '밤학교'라든지 '밤배움터'라 옮겨적어야 마땅할는지 궁금합니다.


 ┌ 달빛 배움터
 ├ 별빛 배움터
 ├ 저녁 배움터
 └ …

산기슭부터 산꼭대기까지 촘촘하게 들어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을 놓고 누군가는 '판자집'이라 하고 누군가는 '철거민촌'이라 하며 누군가는 '빈민촌'이라 합니다. 그런데 또다른 누군가는 '달동네'나 '산동네'라 했습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닐지라도 산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 터전이니 말 그대로 '산동네'입니다. 달을 마주하거나 바라보거나 등에 지며 살아가는 터전이라 할 만하니 '달동네'입니다.

똑같은 마을이나 동네이지만, 어느 자리에서 어떤 눈썰미로 바라보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붙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누군가한테는 몹시 꾀죄죄하거나 낡아 보일지라도, 누군가한테는 더없이 사랑스러우며 살가울 수 있거든요.

 ┌ 나이트스쿨 서머스쿨 비즈니스스쿨
 └ 나이트파티 나이트클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한 마디로 말하여 '영어 중독'에 걸린 모양새가 아니랴 싶습니다. 여름에 배우는 터전이라면 '여름학교'라든지 '여름배움터'나 '여름배움마당'이라 하면 넉넉합니다. '서머스쿨'이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상업을 가르치니까 말 그대로 '상업학교'입니다. 상업학교를 영어로 '비즈니스스쿨'이라 고쳐서 쓴다고 해서 나아지거나 달라지거나 거듭날 까닭이 없습니다. 껍데기만 달리 씌운다고 알맹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영어로 껍데기를 씌운다 해서 아름다워지거나 훌륭해지거나 멋있어지지 않아요. 인천에는 '비즈니스고등학교'라는 간판을 내붙인 곳마저 있는데, 인천에 있는 '비즈니스고등학교'는 몇 해 앞서까지 '선화여자상업학교'였습니다. 적잖은 '상업학교'들이 '정보통신학교'라든지 '정보고등학교' 같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었는데, 아예 영어로 학교이름을 짓는다 해서 세계 눈높이에 걸맞는다든지 국제 시대에 발맞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밤잔치'라 하면 시골스럽다 여기며 '나이트파티'라고들 일컫습니다. '밤놀이터'라 하면 우스꽝스럽다 생각하여 '나이트클럽'이라고들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공부'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스터디'를 한다고 말하는 공부벌레들이 꽤 많습니다. '스터디 클럽'을 짠다느니 '스터디 공간'을 찾는다느니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왜 '잉글리쉬 스터디'라고는 않고 '영어 스터디'라고 하는지 살짝 궁금하곤 합니다. 그렇게 영어가 좋으면 송두리째 영어로만 말하며 살 노릇 아니겠습니까.

ㄴ. 프라이/후라이(fry)

.. "응, 내가 직접 만들어. 크림 스튜도 잘 만들고 계란 프라이도 잘해." ..  <유모토 가즈미/양억관 옮김-고마워, 엄마>(푸른숲,2009) 86쪽

'직접(直接)'은 '몸소'나 '손수'나 '스스로'로 다듬습니다. '스튜(stew)'는 서양 먹을거리이기 때문에 서양말로 가리켜야 하지 않느냐 싶기도 하지만, '국'이라든지 '찌개'라든지 '조림' 같은 낱말로 일컬어도 괜찮지 않으랴 싶습니다. '섞어찌개'라든지 '모둠찌개'라 하면서 앞가지를 알맞게 붙여 볼 수 있을 테고요. 저마다 어떤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냐를 가만가만 살피면서 내가 마련하여 즐기는 먹을거리에 가장 알맞을 이름을 찾아본다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 프라이(fry) : 음식을 기름에 지지거나 튀기는 일. '부침', '튀김'으로 순화
 │   - 계란 프라이 / 생선 프라이
 │
 ├ 계란 프라이
 │→ 달걀 부침
 │→ 달걀 지짐
 └ …

어릴 적부터 으레 듣던 흔한 먹을거리 이름 가운데 '계란 후라이(프라이)'가 있습니다. 국민학생이던 때에 이 먹을거리 이름이 옳으니 그르니 생각하거나 따진 적은 없습니다. 어른들이 하나같이 '계란 후라이(프라이)'라 말하니 저 또한 어른들 말씨를 고스란히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어느 선생님이 살짝 꼬집지 않았느냐 싶은데, 아니 국민학교 국어 시간이었을 텐데, 한글날 즈음 해서 우리 말과 글을 다시 돌아보자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말 '달걀(닭알)'이 있어도 '계란'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뿐 아니라 '에그(egg)'라는 영어까지 버젓이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때가 1980년대 첫머리인데, 동무들 가운데 영어로 '에그'라는 말을 쓰거나 이런 영어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모두들 그냥저냥 '계란'이라고만 말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어른들이 '달걀 한 판'이라 말하기보다 '계란 한 판'이라고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달걀도 잘 부쳐
 ├ 달걀도 잘 지져
 └ …

개구쟁이요 코흘리개였던 철부지는 어린 날에 한글날 즈음 해서만 '아, 달걀이라고 하는 좋은 우리 말을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뉘우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금세 잊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해 되풀이하다가 어느 해에 비로소 '부침개'가 부쳐서 먹는 밥거리라면 달걀 또한 부쳐서 먹는다고 하면 '달걀 부침개'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달걀 부침개'라 하면 좀 안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달걀 부침'이라고만 하면 될까 하고 생각을 고칩니다. 어른들은 '부쳐' 먹는다고도 말하고 '지져' 먹는다고도 말하니까, '달걀 지짐'도 맞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는 저 스스로 '달걀 부침'과 '달걀 지짐'이라는 말만 쓰기로 다짐하고 이를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밥을 해 주시는 어머니는 언제나 '계란'이었고 '계란 후라이'였습니다. 때때로 "계란 하나 부쳐 줄까?"라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 "계란 후라이 하나 해 줄까?"라는 말씀을 훨씬 자주 했습니다.

한 번 굳은 말버릇이란 고치기 힘들고, 한 번 뿌리내린 말투란 눈을 감는 날까지 이어지리라 봅니다. 옳고 바르고 좋은 말버릇이든 궂고 뒤틀리며 못난 말버릇이든 고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못 고친다고 해야 맞지 싶습니다. 따스하고 넉넉하며 사랑스러운 말투뿐 아니라 차갑고 메마르며 모진 말투 또한 언제나 이어지는 매무새가 아니랴 싶습니다. 참말 뼈를 깎듯 애를 쓸 때라야 바로잡는 내 말버릇이요 말투요 말결이요 말매무새요 말씀씀이라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영어 #미국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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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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