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하수상한 시절에 읽는 전쟁 소설 3편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 하진의 <전쟁 쓰레기>, 이스마엘 베아의 <집으로 가는 길>

등록 2010.06.16 11:20수정 2010.06.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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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어린 나이에, 우연히 '전쟁'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그것 때문에 꽤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6월 25일이 되면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던 게다. 어머니가 "그런 일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 것에 안심했던 것까지,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을 잊었다.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학생이 됐을 때, 1994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또한 과거의 일이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외신에서 한반도가 '휴전 상태'라는 말을 들을 때야 문득 떠올리곤 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요즘 그 단어가 퍽 가깝게 느껴진다. 그저 하나의 단어였던 그것이,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말과 어떤 이유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들 사이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컵 때문에 유난히 흥겨운 지금,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다 이렇게 '설마'라는 단어까지 생각하게 됐는지를 돌이켜보면, 마음 한 곳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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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표지 ⓒ 문학동네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를 읽었다. 1980년 일본 작가와 비평가가 선정한 전후문학 베스트 3위에 올랐다는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의 고전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손을 뻗는 심정은 고전을 읽자, 는 생각이 아니었다. 전쟁을 다뤘다는 이유 때문이다.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인 체험이 담긴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은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뒤, 일본이 급속도로 몰락하던 시절이다.

<포로기>의 '나'는 전쟁에 나섰다. 왜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일까? 누가 '나'에게 총을 준 것일까? 필리핀의 섬에서 온갖 고생을 하던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를.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이었던가? 아니다. 이건 침략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군인이 되어 영웅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또한 아니다. 정치가들의 뜻에 따라 이곳에 왔다. 그리고 어느 날, 무기력하게 포로가 된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포로가 됐는지도 모른다. 함께 있던 누군가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폭격 때문에 죽고 또 다른 누군가는 벌벌 떨다가 총을 맞아 죽었다. 그에 비하면 포로가 된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가. 하지만 스스로가 비굴하다고 생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살아도 떳떳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고 미군을 향해 뛰어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포로기>의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러는 사이, '나'는 수용소에 갇히고 그곳에서 참으로 역겨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 경험들이 모인 것이 바로 <포로기>인 것이다.

<포로기>는 많은 것을 풍자하고 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뒤에도 권력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쟁'이라는 단어에 담긴 그 많은 것들을 하나의 칼처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언젠가 이런 소설을 보면 '훌륭하다'라고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왜일까. 요즘에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전쟁', '포로'라는 단어들이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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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쓰레기> 표지 ⓒ 시공사

<포로기>처럼 포로수용소를 다룬 소설하면 하진의 <전쟁쓰레기>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중국의 순박한 청년 유안. 그는 마음씨 좋은 동네의 아는 형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본인이 자처한 건 아니다. 나라에서 시킨 일이었다.

전쟁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 유안은 모른다. 이데올로기도 모른다. 오로지 살아 돌아와야 한다, 는 생각뿐이었다. 유안만 그런가. 많은 청년들이 그랬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포로가 된다. 유안도 그랬다.

포로가 된 것이 수치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살았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로수용소가 또 다른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지독한 고문이 버젓이 자행되는, 또 다른 지옥이었던 것이다.

유안은 왜 그런 일들을 겪어야 했던 걸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유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고문 등을 그리는 하진의 글이 생생하기에 그런가?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유안이 겪어야 했던 그 많은 부조리한 일들, 그것을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단어가 어느 때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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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표지 ⓒ 북스코프

이스마엘 베아의 <집으로 가는 길> 또한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전쟁을 경험한 열두 살의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으로 그 완성도가 뛰어나다.

그래서 자주 펼쳐보던 책이건만, 요즘에는 그 느낌이 다르다. 두렵다고 해야 할까? 랩을 좋아했던 철없는 소년은 반군 때문에 갑작스럽게 피난을 떠난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떠돌던 소년은 '정부군'의 일원이 된다. 소년병이다.

소년병이 된 소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죽이는 것이다. 랩을 좋아하던 소년, 그 아이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을까? 누구도 그것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총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시킨다. 그 순간의 소년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는, 얼마나 가슴 졸여야 했을까?

포로기 (반양장)

오오카 쇼헤이 지음, 허호 옮김,
문학동네, 2010


#전쟁 #포로수용소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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