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은 사약을 받으시오

[역사소설 민회빈강41] 사약을 마시고 절명한 세자빈

등록 2010.06.17 09:19수정 2010.06.1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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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회원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잠들어 있는 민회빈 강씨 ⓒ 이정근


"무슨 어명이오?"
"죄인을 사사하라는 명이오."
"사사라고 하셨습니까?"

청천벽력 바로 그것이었다. '전복구이 독극물사건'은 아무리 조작해도 하늘이 알아 줄 것이라 믿었다. 사산한 아기 시신을 궁 밖으로 내보낸 것이 죄라면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허나, 그것이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큰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궁에서 나가라 해서 나왔는데 사사(賜死)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후원 별당에 유폐될 때, 폐출하여 서인으로 강등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 했다. 하지만 죽임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궁녀들이 모진 고문에 죽어나갔지만 죽일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몽롱한 현기증이 엄습해왔다. 쓰러질 것만 같다.

"그래도 이 나라의 세자빈이다. 체통을 잃지 말아야 한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정신을 다 잡았다.

"사사라면 명문이 있겠지요?"
"그렇소."

금부도사 오이규가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읽어 내려갔다. 임금의 의중을 받들어 승정원에서 작성한 전지(傳旨)였다. 인조의 수결이 선명한 왕지를 확인한 세자빈이 무릎을 꿇었다.

"죄인은 사약을 받으시오."
"사약을 받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죄인과 도사 간에 묻고 답하는 것은 금지사항이지만 옛정을 생각하여 아는 한 답해주겠소."


간신이 인의장막을 치고 있다면 군주는 눈 뜬 장님이다

병자호란 전, 진사시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한 오이규는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로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가까이서 모셨던 인물이다. 또한 세자빈의 남동생 강문명과 세마직을 인수인계한 선후배 사이었다. 세마는 동궁전의 말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정9품 벼슬이다.

"내의원 도제조에 누가 있소?"

임금 지근거리에 누가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병치레가 잦고 침 맞는 것을 좋아하는  인조 곁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사사가 누구의 계략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상이 겸하고 있소."
"김자점대감 말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전하께서 지금도 이형익에게 침을 맞고 있겠구려."
"침을 맞는 것 까지는 모르나 이형익이 드나드는 것은 몇 번 보았소."
"그렇다면 사사의 명이 나올 만 하오."

소의 조씨가 궁으로 불러들인 시골의원 이형익과 후궁전의 뒷배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자점이 인의장막을 치고 있다면 사사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 세자빈은 마음을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빈이 동쪽을 향하여 4배를 올렸다. 임금이 있는 창경궁 쪽이다. 며느리가 아닌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마지막 예다. 국궁4배를 마친 세자빈이 다시 북쪽을 향하여 3번 절을 올렸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을 향한 절이라는 것을 알 길이 없는 금부도사 오이규가 생뚱맞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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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원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잠들어 있는 소현세자 ⓒ 이정근


자리에 정좌한 세자빈이 약사발을 받아들었다. 감색 사약 수면에 하얀 뭉게구름이 떠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반영이었다. 구름 사이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보였다. 소현세자였다. 세자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 눈망울이 슬퍼보였다.

"저하!"
불러보았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빈궁! 예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입술이 파랗게 떨렸을 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자빈이 단숨에 사약을 들이켰다. 독기(毒氣)가 온 몸에 퍼져 나갔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무릎이 풀렸다. 비소에 부자와 게의 알을 으깨어 꿀에 뭉치고 제련하지 않은 황금가루와 독극물을 넣어 만든 환을 소주에 풀어놓은 사약(賜藥)을 마셔서 그럴까. 주기(酒氣)가 혈관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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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 경기도 광명시 있는 영회원을 지키고 있는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이 나무는 세자빈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알고 있을까? ⓒ 이정근


엄습해 오는 통증과 구름 위를 나는 것만 같은 환각이 교차했다. 이때였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석견이었다. 귀국하던 해, 심양에서 낳아 강보에 싸가지고 돌아온 세 살배기 막내아들이었다.

"석견아!"

손을 뻗어 잡아보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세자빈의 팔이 허공을 맴돌았다. 찬바람이 스산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석견의 얼굴이 사라졌다. 피를 토하던 세자빈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금부도사! 사약이 남아 있으면 더 주시오."

금부도사 오이규로부터 약사발을 받아든 세자빈이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쨍그랑'

약사발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선혈이 낭자한 세자빈이 앞으로 쓰러졌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래도 머리는 지아비가 잠들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숨을 거두었다.
#영회원 #민회빈 #소현세자 #사약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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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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