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104) '3ㄷ'과 '3D'

[우리 말에 마음쓰기 931] '큰거리'와 '대로-대도-대가'

등록 2010.06.19 12:10수정 2010.06.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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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큰 거리

.. 일광큰거리日光大街 ..  <김은국-소련과 중국, 그리고 잃어버린 동족들>(을유문화사,1989) 140쪽 사진


중국조선족이 살아가는 땅 모습을 담은 사진을 봅니다. 얼핏 '큰거리'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큰거리'라는 이름을 곱씹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들 복닥이는 길거리 한켠에 아주 자그맣게 보이는 길알림판에 적힌 글월인데, 저는 두고두고 눈길이 멎습니다. 곰곰이 되뇌며 '큰거리' 뒤에 한자로 적인 '大街'를 가만히 새깁니다.

 ┌ 큰길 / 한길
 └ 대로 / 大路

우리들은 안 쓰는 한문인 '大街'입니다. 우리들이 쓰는 한자말 이름은 '大路'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대로'를 찾아보면 말풀이를 "= 큰길"처럼 적어 놓지만, '큰길'이라 말하는 사람보다 '대로'라 말하는 사람이 좀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한테 살갑고 알맞고 올바른 우리 말이 있는 줄 찬찬히 살피며 슬기롭게 말하는 사람은 퍽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지난날 어느 대통령은 '대도무문'이라는 글월을 한자로 적바림하며 스스로 멋들어진 말이라고 내세웠던가요.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다시금 '대도(大道)'를 찾아보면 말풀이를 "= 큰길"로 적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대로'든 '대도'든 우리 말이 아니란 소리요, 우리한테는 '큰길' 한 가지가 우리 말이란 얘기입니다.

'큰길 = 한길'입니다. 둘은 같은 이름입니다. 크니까 큰길이요, '한길'에서 '한'은 '큼'을 뜻합니다.


 ┌ 큰길 ↔ 작은길
 ├ 넓은길 ↔ 좁은길
 ├ 한길 ↔ 샛길
 └ 트인길 ↔ 골목길

크기에 큰길이라면 작기에 작은길입니다. 그렇지만 '작은길'은 한 낱말로 삼지 않는 국어학자입니다. 그래도 '샛길'과 '골목/골목길'이라는 낱말이 있기는 합니다. 말씀씀이뿐 아니라 삶자락을 살핀다면 '작은길-넓은길-좁은길-트인길-너른길'은 모두 한 낱말로 삼을 만합니다. 여기에 '굽은길-곧은길' 또한 한 낱말로 삼을 만합니다. 사람이 뚜벅뚜벅 걷는 길뿐 아니라, 사람이 일구는 삶을 빗댈 때에 쓰는 '바른길'도 한 낱말로 삼을 만할 테지요. 그런데, 용하게 '바른길' 한 가지만큼은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 큰거리
 └ 작은거리

남녘땅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틀림없이 '큰길'입니다.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다름아닌 '큰거리'입니다. '큰길'이나 '큰거리'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남녘땅에서는 '큰거리'를 '큰길'과 거의 같거나 똑같이 쓸 수 있는 한편, 살짝 달리 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서울 광화문 앞이라든지 종로라든지 혜화동 같은 곳은 '큰길'이면서 '큰거리'입니다. 이들 큼지막한 거리를 놓고 '큰거리'라 가리켜 보면 꽤 잘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서울 인사동 같은 데는 '인사동 작은거리'라 일컬을 수 있겠지요. 서울 인사동을 놓고 흔히 '인사동 골목'이라 하지만, 골목과 거리는 다르며, 골목으로 빠져나가기 앞서 자동차와 사람이 부대끼는 곳은 '작은거리' 같은 이름으로 가리켜야 알맞습니다.

'거리'와 '길'을 거의 같이 쓰지만, 느낌과 쓰임이 살며시 다릅니다. 이와 같은 말맛을 살리고 살피며 북돋운다면, 우리는 우리 말뿐 아니라 우리 삶을 넉넉하고 즐거이 어루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헌책방이 있어 헌책방 거리이듯, 옷집이 있어 옷집 거리입니다. 문화를 누리니 문화 골목이요 젊음이 넘치기에 젊음 골목입니다.

 ┌ 옷집거리 / 옷집골목 / 옷집길
 ├ 문화거리 / 문화골목 / 문화길
 ├ 젊음거리 / 젊음골목 / 젊음길
 ├ 헌책방거리 / 헌책방골목 / 헌책방길
 └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길을 걷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은 노래길을 걸으며, 농사를 짓는 일꾼은 농사길을 걷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기에 저마다 다른 삶길을 건사합니다. 생각길을 추스르고 마음길을 닦으며 사랑길을 돌봅니다.

ㄴ. 3ㄷ(고된일/힘든일) - 3D(삼디/쓰리디)

.. 그래서 유학생들의 부인들은 웬만하면 3D를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생 남편들을 내조해 왔다 ..  <유재순-下品의 일본인>(청맥,1994) 27쪽

"유학생들의 부인(婦人)들"은 "유학생들 아내"로 다듬어 봅니다. '아르바이트(Arbeit)'는 흔히 쓰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다른 일을 하여"나 "온갖 일을 하여"나 "일을 하여"나 "이 일 저 일 다 하여"로 손보면 한결 나으리라 봅니다.

그나저나 우리들은 먹고살자는 뜻에서나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서나 '일을 하'면서 '일한다'고 말하지 않아 버릇합니다. '근무(勤務)'이니 '근로(勤勞)'이니 '노동(勞動)'이니 '노무(勞務)'이니 할 뿐입니다. '일'이라는 우리 말을 알맞게 쓰지 않을 뿐더러, 이 낱말 하나를 알뜰살뜰 살려서 새로운 말마디를 일구려 하지 않습니다.

 ┌ 3D직종 : Difficult, Dirty, Dangerous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
 └ 4D직종 : 기존의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의 3D업종에 원거리(distant)라는 특성이 있는 원양업계를 일컫는 말

'삼디'라고도 하고 '쓰리디'라고도 하는 일을 곱씹어 봅니다. 힘들게 일하면 힘들게 일한다 말하면 될 테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는 가운데 그저 '삼디-쓰리디'라는 말마디로 굳어집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일 매무새를 우리 말로 담아내기란 수월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세 가지 힘든 일"이라 할 수 있고, 그냥 '힘든일'이라 하거나 '궂은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든 세 일'이라 하든지 '궂은 세 일'이라 말할 수 있어요.

 ┌ 세 가지 힘든 일 / 힘든 세 일
 └ 힘든일 / 궂은일

'힘든일'이나 '궂은일'이라고 말한대서 이 일이 꼭 '몸을 더럽힌다'든지 '위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힘들거나 궂은 일은 몸이 더러워지거나 위험하게 되는 일이곤 합니다. 세 가지를 따로 나누어서 그렇지, 한 마디로만 말해도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구나 싶은 모습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삼디-쓰리디'라 하는 일이란 바로 '힘들다 하는 일'이요, "요즘 사람들은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해" 같은 말마디에서 '힘든 일'이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가리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 힘들다 / 힘겹다 / 궂다 / 고되다 / 고달프다 / 어렵다 / 까다롭다

세 가지로 힘들다고 하는 일은 '일한 뒤 받는 일삯'이 안 많기 일쑤입니다. 일삯을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면 '힘들거나 궂은 일'이라고 안 하겠지요. 힘들게 일한 보람이 넉넉하다면 그저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할 테지요.

보기를 들어, 새벽이나 깊은 밤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받는다고 해 봅시다. 이 일을 '힘들거나 궂은 일'이라 할 사람 있을까요. 시골 농사꾼이 다달이 이천만 원씩 받는다고 해 봐요. 어느 누구도 거리끼거나 멀리하지 않겠지요. 그러니까 '삼디-쓰리디'라고 하는 일은 "힘은 힘대로 들면서 일삯은 일삯대로 제대로 못 받는 일"이라 해야 옳지 싶습니다. '막대접 일거리'나 '푸대접 일거리'가 '삼디-쓰리디'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사람들 입과 삶에 '삼디-쓰리디'가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이모저모 걸러낸다든지 다듬기란 힘듭니다. 그래도 생각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 우리 깜냥껏 새 이름을 하나 지으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더럽고 등골 휘고 다치는' 일이라 하면서 '3ㄷ'이나 '세ㄷ'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럽고 땀나고 두려운' 일이라 해 보아도 '3ㄷ'이나 '세ㄷ'이 됩니다.

 ┌ 3ㄷ / 세ㄷ
 └ 세디귿

'3D'는 그냥 '삼디-쓰리디'라고만 말하지 말고, 'Difficult, Dirty, Dangerous'를 어떻게 알맞고 손쉽도록 우리 말로 옮겨내어 우리들이 오순도순 나눌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옳게 옮기고 알맞게 옮기며 슬기롭게 옮기는 가운데 우리 말과 넋과 삶을 빛내야지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살려쓰기 #토박이말 #국어순화 #한글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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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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