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가락은 던져졌다

[역사소설 민회빈강49]주신이 주신대로 마시고 싶었다

등록 2010.07.16 09:53수정 2010.07.1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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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에 예를 표하고 무사를 빌었다

발걸음을 재촉한 이성용과 배대승이 관아에 도착했다. 앞마당에 서있는 느티나무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수령 100여 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가지를 베거나 나무에 위해를 가하면 꼭 그 사람에게 저주를 내렸다. 이성용과 배대승이 두 손을 모으고 나무에 예를 표했다.


중종 39년(1544) 이 마을에 역병이 돌았다. 의원 하나 없는 고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백 명이 '퍽퍽' 쓰러졌다. 환자를 병문안 밖으로 내보내 격리하는 것 외에 달리 대책이 없었다. 복불복이다. 환자 굴에 내몰린 사람 중에 명이 긴 자는 살고 짧은 자는 죽었다.

석성에 사는 의원 서희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료했다. 괴질은 40여 명의 목숨을 거두어 가지고 물러났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서희의 헌신적인 봉사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석성에서 나무를 옮겨 심고 당산목으로 삼았다.

느티나무.  수령 45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오늘날에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느티나무. 수령 45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오늘날에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이정근

고래 등 같은 건물들이 이성용의 눈에 익숙했다. 낯선 건물들이 아니었지만 왠지 낯설어 보였다. 동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성용의 손목을 잡은 배대승이 마당을 가로 질러 관사에 도착했다. 배대승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영감님 계시옵니까?"
"누군데 이 밤중에 성화냐?"

주신이 주신대로 마시고 싶었다


기생을 품고 주도(酒道) 삼매경에 빠져 있던 현감이 역정을 냈다. 예나 지금이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급수가 있다. 술을 마시기는 하나 겁내는 사람을 외주(畏酒)라 하고 성생활을 위해서 마시는 사람을 색주(色酒)라 하며 술의 참맛을 배우는 사람을 학주(學酒)라 한다. 이 모두 주도에 들기 위한 초보단계다.

현감 유동준은 이미 술의 진경을 체득한 탐주(探酒)자에게 붙여주는 주호(酒豪)의 경지를 지나 주선(酒仙)의 반열에 와있었다. 주선의 활동반경은 주도 삼매경이다. 삼매경을 제대로 주유하여야만 주현(酒賢)에 이를 수 있다. 유동준은 평소 겸손하게 주도에 임했고 성실하게 학습했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뭔가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탈이 그를 유혹했다. 오늘만큼은 주신(酒神)이 주신대로 마시고 주신에게 몸을 맡기고 싶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마시고 기생의 치마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래야만 가슴의 응어리가 풀릴 것만 같았다.

"꽁실골에 사는 배대생이온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 없다."

싸늘하게 잘랐다.

"호호호!"

기생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성용의 귀에 익은 목소리다. 배대생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기생을 안았으니 "부어라"" 마셔라"

"화급한 일이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내일 아침에 오라."

"이런 젠장, 한시가 급한 일인데 내일 아침이라니? 이 밤에 산채꾼들이 내려와 목이라도 따 가면 어떡하려고?"

배대생이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무이옵니다."
"공무라면 더더욱 볼일이 없다. 퇴청한 지가 언제인데 공무란 말인가?"

절망이다. 기생 끼고 술 마시다 보면 내일 마실 목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안타까웠다.

"이성용과 같이 왔습니다."
"뭣이? 이 초관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성용이 오기를 기다렸지 않은가. 놀란 현감이 장지문을 열었다.

"자네가 웬 일인가?"

현감의 시선이 이성용에게 꽂혔다. '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느냐?'는 눈초리다.

"이 초관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하옵니다."

배대승이 운을 뗐다.

"뭔데?"

현감이 이성용을 쏘아보았다.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십시오."

배대생이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유동준이 기생을 쳐다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온 지 언제인데 공무야? 아이 재섭서!"

자리에서 일어난 삼월이가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눈을 흘겼다. 기생을 물리친 현감이 이성용과 배대승을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어서 말해보게."

두 사람으로부터 예를 받은 현감이 채근했다.

"산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머뭇거리던 이성용이 입을 열었다.

절묘한 화법을 구사하는 현감

"산채가 뭔데?"

배대승을 의식한 현감이 금시초문이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산채에 있는 역도들이 초하룻날 거사한다고 합니다."
"으음!"

현감이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알았네. 물러들 가게."

이성용과 배대승을 돌려보낸 유동준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공직생활 23년 만에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다."

그러나 기회는 개미굴만 하고 호랑이굴 만한 위기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하면 중앙관직에 나아갈 수 있고 못해도 시어미가 많은 이산은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산은 유학과 선비의 고장답게 과거급제자가 많았다. 중앙관직을 역임했던 이 고장 출신들은 고을 현감을 아랫것 대하듯 했다. 조정에 있던 사람이나 전 현감 윤현각은 조언한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유동준은 참견을 넘어 간섭으로 여겨졌다. 불쾌했다. 고을의 수장은 자신인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자존심 상했다. 상념의 바다에서 빠져 나온 유동준이 붓을 잡았다.

"이 서찰을 방백에게 급히 전하라."

공주 감영으로 급주마를 띄운 유동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윷가락은 던져졌다. 공중제비를 돌던 윷가락이 어떻게 착지할지 모른다. 모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던졌지만 개나 걸이 나올 수 있다. 바람을 맞으면 도가 나올 수도 있다.

한 편, 긴박하게 돌아가는 산 아래와 달리 산채는 태평했다.
#관아 #느티나무 #괴질 #역병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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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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