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프로그램 봉사자이자 골롬반 신학원의 사제인 전요한 신부가 주재한 미사에서 평소 고인과 가깝게 지냈던 김창석(세례명 도마)씨는 고인의 고향에 함께 갈 것을 여러번 권유받았지만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주고 받았던 상처에 대해 용서를 청하여 주위를 숙연하게 하였다.
한편 아피공동체, 즉 국제가톨릭형제회(A.F.I. ;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는 1937년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뱅상 레브(Vincent Lebbe, 중국명 雷鳴遠, 1877~1940) 신부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벨기에 여성 이본 퐁슬레(Yvonne Poncelet, 1906~1955)에 의해 설립되었다. 뱅상 레브 신부는 가톨릭의 토착화와 평신도 활동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온전한 자아봉헌을 뜻하는 전(全), 참다운 사랑으로서의 진(眞), 끊임없는 기쁨을 의미하는 상(常)의 세 단어로 가톨릭 복음의 핵심을 표현했다.
한국에서의 국제가톨릭형제회의 활동은 주로 여성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으며 여학생기숙사 운영을 시작으로 하여 점차 의료, 노동, 아동 등의 사회복지 분야와 여성교육, 상담 등의 교육분야 및 도시빈민, 노동, 인권 등의 사회운동분야로 확대하였다. 이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 JOC의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였다. 현재는 명동의 전진상 교육관, 안양 전진상 사회복지관, 시흥 전진상 복지관을 운영하면서 빈민의료, 상담, 무료급식, 이주노동상담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안젤라 미스투라는 193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하여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이던 1956년 가톨릭 서울대교구 주교이던 노기남 대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서 국제가톨릭형제회를 설립하기 위해 독일과 벨기에인 A.F.I.회원과 함께 입국했다.
전쟁의 폐허가 미처 복구되지 않았던 당시 변변한 공항이 없어 임시로 활주로를 만들어 공항으로 사용하던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미스투라는 곧바로 명동 주교관 옆에 있는 작은 일본식 가옥에 지방 여대생을 중심으로 하는 기숙사(현재의 전.진.상.교육관)를 개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교육의 여러 분야에 몰두하게 된다.
1964년에는 한국인 회원 4명이 최초로 서약을 함으로써 국제가톨릭형제회의 본격적인 확장과 발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여성교육에 좀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 페루자에서 이탈리아어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돌아와 196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 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외대 이탈리아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가톨릭형제회의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노기남 대주교의 비서역할도 병행하면서 70년대 유신체제와 80년대 신군부에 의해서 탄압에 내몰렸던 한국 가톨릭교회를 유럽에 적극 알려 위기를 극복하게 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동참하여 회원 중 여러명이 남산의 모처에서 모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외대교수로 재직중이던 1983년 말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면서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관악구 신림10동 328번지 달동네로 이주한다. 항상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며 살았던 안재란 교수는 방 두 칸인 집을 동네사람들에게 개방하고 어린이들과 가까이 지내며 공부방, 어린이집 등을 지원하였다. 이밖에도 '기적을 이루는 사랑', '젊은이를 위한 선택 프로그램', '결혼생활대화모임(Marriage Encounter)' 등 가정과 젊은이를 위한 프로그램에 오랜 시간 동안 헌신했다.
한국에서 첫발을 내딛었던 명동성당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 고인의 유해는 비봉 가톨릭 추모공원에 안장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역사와 여행에 관심이 많은 순수미술갤러리 갤러리앨리스 대표입니다.
가족을 위해 우리농업을 살리는 친환경 안전한 먹을거리 운동을 해 왔고 생활협동조합운동과 친환경먹을거리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싶어서 가입했습니다. 미술과 여행에 대한 관심도 기사가 된다면 게시하고 싶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