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화가 마타하리? 한국 정보계의 망신"

[8.15 기획인터뷰] '여간첩'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

등록 2010.08.15 15:40수정 2010.08.1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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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첩 등의 혐의로 12년 구형을 받았던,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간첩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65)씨가 7월 15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재판장 안영진)에서 진행된 항소심 재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 등의 혐의로 12년 구형을 받았던,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간첩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65)씨가 7월 15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재판장 안영진)에서 진행된 항소심 재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장윤선

아수라장이었다. 화분은 깨진 채로 나뒹굴었고, 쏟아진 흙은 방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화초와 꽃은 주인 없는 사이에 모두 말라죽었고, 구석구석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하수구까지 도합 3차례, 검찰이 훑고 간 집안은 초토화 그 자체였다.

탈북 위장간첩 혐의로 체포돼 1심 재판정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난 김동순(65). 그는 2009년 2월, 5개월 만에 돌아온 집안 풍경을 이같이 묘사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붓딸에 의한 고발. 그는 2008년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간첩 원정화에게 10억원 상당의 물품 등 편의를 제공해온 혐의로 구속됐었다. 만 2년 만에 항소심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은 그는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긴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지난 7월 6일과 15일 두 차례 <오마이뉴스>와 만난 김씨는 마치 낡은 영화필름의 한 장면처럼 자기 인생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흐느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이 땅을 찾아왔는데 결국 의붓딸의 고발로 간첩 혐의까지 받게 된 그의 굴곡진 인생사는 광복절 65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금 통일과 남북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구술을 토대로 그의 삶을 정리해본다.

임신 4개월 아내와 헤어지다

김동순은 북한의 미술사였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화가다. 평양미술대학 조각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7년 10월까지 북한 제2경제위원회(군수공업 총괄) 소속 동해약전기계공장(일명 97호 공장) 초급당위원회 선전부 직속 미술사였다.

30세가 되던 1975년 12월 김○○과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이다.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본처의 장모와 재혼한 새 장인이 조총련을 통해 입북한 위장간첩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1976년 4월엔 장모가 김일성-김정일 체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고, 가옥 등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당시 김동순은 공장 안에서 하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부부는 떨어져 살았는데, 아내가 살고 있던 청진시 청암구역 인곡2동에 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접했다. 장모는 어디로 끌려갔는지 정확한 행선지를 알 수 없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출신성분을 중시하는 북한사회에서 처가의 상황을 알게 된 초급당위원회에서는 김씨에게 이혼을 권유했다. 출세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처가뿐 아니라 김씨의 형님(김○○)도 민족반역죄로 중형을 선고받은 뒤였다. 김일성대 어문학부 도서관학과를 졸업한 뒤 북한 인민대학습당(국립중앙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김씨의 형님은 업무상 접촉해오던 러시아대사관 문화공보담당에게 '반소 투쟁자료'를 건네줬다는 이유로 1964년 10월 국가기밀누설죄(민족반역죄)로 평양시 중구역인민재판소에서 15년형 중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로 형님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남한에 가족이 살고 있다는 걸 숨겨왔었다.

"당위원회 조직비서 등이 찾아와 이혼하라고 권유했어요. 앞길이 완전히 막힌다는 거예요. 그러나 처가 임신 4개월이었어요. 인간으로서 도저히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요. 눈치 보기 하면서 몇 달을 끌어왔는데, 당위원회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거칠어지고 나보다 어린 애를 선임해서 같이 일하라고 하는 등 도저히 견딜 수 없도록 했지요."

버틸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아들이 둘뿐인데 형님의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 본인마저 지위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부모님이 반기지 않았다는 게다. 결국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첫 번째 부인과 이혼했다.

"나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형도 민족반역죄로 처벌받았지, 처가도 그렇지,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요. 지금 고생해도 후대가 고통 받지 않으려면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간첩 원정화 계부 김동순씨.
여간첩 원정화 계부 김동순씨.권우성

영양실조로 머리카락 안 난 딸을 본 아비의 심정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질게 끊어버린 첫 번째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을 거쳐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지 이순을 넘긴 노인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던 그는 휴지로 눈물을 닦은 뒤 말을 이어갔다.

"버리지 말아달라는 아내를 뿌리치고 애만 데려온 게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요. 그런데도 그 아이를 제가 기르지도 못하고 연로한 부모님께 맡기고 저는 재혼한 여자의 아이들만 길렀으니 그 속이 편할 리 있습니까. 정말 가슴 아프게 헤어졌습니다."

1977년 9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김씨는 그해 11월 건재공업부 산하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 세멘토 공장 광산사업소 공무직장 단야공 기술준비원으로 배치됐다. 전과자나 반체제 행위를 하다가 추방된 사람들, 이른바 사상 개조 대상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해머를 다루는 '단야공'으로 일했다. 공장에서 아이를 기르기는 어려웠다. 이런 형편을 감안해 청진에 살던 부모님은 첫딸 김옥경을 대신 맡아주었다. 민족반역죄로 잡혀간 형님의 아들과 김옥경, 둘을 늙은 부모님이 돌본 것이다. 

단야공으로 일하던 시기인 1977년 11월 김씨는 원정화의 생모인 최○○을 만나게 됐다. 그 후 1978년 2월 16일 김씨는 최씨와 재혼을 하게 된다. 김씨는 이것을 악연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김씨는 최○○과 재혼한 뒤 두 명의 자식을 더 얻게 됐다. 최○○과 전 남편 원○○ 사이에서 낳은 원○○(1971년생)과 원정화(1974년생)였다. 당시 새로 얻은 아내 최○○은 고무산 공장의 탁아소 보육원으로 일했다. 서로 아픔을 겪고 재결합했으니 아이들만큼은 잘 기르자고 합의했다. 그리고 첫딸 김옥경을 고무산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1978년 3월 출장을 다녀오니 집에 김옥경이 없었다. 알아보니 김씨의 아버지에게 기별을 해서 데려가도록 한 것이다. 이유인 즉, 맞벌이 부부인데 1978년 당시 아이 셋을 기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살던 집과 최○○의 친정부모 집은 거의 붙어 있었어요. 최○○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친정부모는 외손주라도 원○○과 원정화를 예뻐해줬어요. 최○○은 날더러 당신이 데려온 딸은 너무 어려 혹시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냐며 유치원 갈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만 시부모님께 맡기자고 했어요."

김씨는 이때부터 최○○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쌓였다고 했다. 휴가가 되면 첫딸 김옥경이 보고 싶어 하루 한 번밖에 없는 기차를 타고 청진역까지 가서 부모님이 살고 있는 나남까지 35리를 걸어갔다고 회상했다.

"애를 보러 가면... 애가, '아버지!' 하고 매달려... 작은 아이가 에미, 애비하고 떨어져 사는 게 측은할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잘 얻어먹지 못해 영양상태도 안 좋지, 여기서야 엄마 젖이 없으면 분유 먹이면 된다, 이럴 수 있지만 그건 우리처럼 가난한 노동자 가족에겐 꿈같은 얘기였어요. 한때는 애한테 영양실조가 와서 머리카락이 나지 않아서..."

"가족이 굶어죽게 생겼는데요"

펑펑 울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낳아만 놓고 제대로 길러주지 못한 첫딸에 대한 미안함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최○○의 반대로 첫딸은 끝내 데려오지 못했다. 이러구러 사는 사이 슬하에 김지혜(가명, 1979년생)와 김형철(가명, 1980년생)을 더 두게 됐다.

"단칸방에 애들 넷, 부부 모두 여섯 식구가 살았어요. 배당 받은 집이 방 2개라지만 다섯 평 남짓이지요. 그러니 김옥경은 데려올 엄두도 못 냈어요. 산골에서 형님 아들인 조카아이는 네 살 때부터 30리 길을 가서 버섯 재배하고 감자농사 지었어요. 그 아이가 벌어 노인들과 첫딸 김옥경이 같이 산 거예요. 우리 집안이 좋다는 검찰 얘기는 정말 말도 안 돼요."

김씨에 따르면, 북한은 고위층이 사는 평양 아파트와 군수급을 제외하면 보통 사택이 방 하나에 3평이 넘는 집이 없다. 보통 방 2칸짜리 집에서 산다는 게다. 북한의 농촌주택은 윗방-정주(아랫방)-부엌의 구조로 돼 있고, 집의 폭은 규격화돼 있는 표준이 있다고 했다.

"자재 때문에 절대로 큰 집을 못 지어요. 부지면적을 다 보고 법원이 지정해준 가격대로 삽니다. 북한에서 10평 되는 집은 한국 돈으로 10만원도 안 될 거예요. 내가 탈북하기 전에 살았던 집도 너비 3.2미터, 길이 8미터 되는 8평 남짓 되는 집이었어요. 좁은 집에 살다가 누가 이사 가면 그 집을 노렸다가 웃돈을 좀 더 주고 이사하는 식으로 집을 넓히지만 그래봐야 10평 수준이지요."

그는 솔직히 북한에서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배급제로 기름도 주고 고기도 주고 식량 수량도 700~900kg을 주는 등의 우대대책이 있었어도, 김일성 사후에는 경제가 완전히 다 망해 지탱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배급제가 있지만 그걸로는 충족이 안 됐기 때문에 먹고사는 건 언제나 자기 부담이었어요. 부식품이 전혀 없고, 오로지 곡식 낱알에 매달려야 했지요.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니까 1주일, 닷새, 3일 그리고는 1990년대부터는 완전히 없어졌어요.

개인이 화전을 해서 무단개간하고 그 땅에 텃밭을 일궈 먹고 살았지요. 산림감독원 1명이 와서 감시한들 온 땅을 다 파는데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요? 배급을 달라, 배급 주면 이렇게 안 한다, 항의도 많이 했지요. 가족이 굶어죽게 생겼는데요 뭘."

그는 가족과 먹고살기 위해 날염(염색, 나염)을 했다. 미술사로서 배운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롱 만드는 목수일도 제법 했다. 시장에서 암거래를 하며 돈을 벌었다. 잔등에 미역을 지고 팔러 다녔다. 함경북도 나진, 선봉, 은덕 등 전국일주 하다시피 다 다녔다. 누가 더 영악하게 돈을 버느냐에 따라 가족의 생계가 달라졌으므로.

그렇게 살던 차에 1992년 김씨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됐다.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청진에 간 그는 16년간 길러준 친딸과 어머니를 모셔오겠다고 최○○에게 요구했지만 반대했다. 아웅다웅 싸움이 벌어졌다.

"외양간을 빌려 개조한 귀틀집에서 첫딸 김옥경과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조카아이 넷이 살았어요. 생활은 형편없었고. 나로선 제대로 된 아들 노릇 한 번 못한 채 어머님까지 모시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큰 상처였지요. 결국 딸과 어머니를 모셔왔지만 날마다 부부가 싸우는 통에 결국 첫딸은 수소문 끝에 제 친어머니가 데려갔고, 제 어머니는 막내여동생네로 가시겠다고 하여 결국 또 함께 살지 못하게 됐어요."

"기벌이를 아십니까?"

 여간첩 원정화 계부 김동순씨.
여간첩 원정화 계부 김동순씨.권우성
북한의 식량위기가 급격히 심화되던 1993년이었다. 김씨 부부와 아이 다섯, 어머니까지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누우면 한 뼘 정도 폭이 남을 정도였다. 도무지 한곳에 살 처지가 아니었던 게다.

"기벌이를 아시나요? 한 끼 벌어 먹고산다 하여 기벌이라고 합니다. 북한엔 기벌이라는 게 있었어요. 식량난이 워낙 심했으니까. 나는 출근할 때마다 볶은 콩 한 주먹씩 쥐고 갔고, 아이들도 그랬지요."

그러던 차에 막내딸 김지혜가 혼인을 하게 됐다. 어부를 하면서 외화벌이 하는 정용희를 만나 1996년 열일곱의 나이에 조혼을 했다.

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식량난은 점점 심각해졌고, 무엇이라도 훔쳐 먹다 걸리면 처형당하는 일도 잦아졌다. 마을 한 가운데서 공개처형도 빈발했다.

"200만 가까운 아사자가 나왔어요. 유랑 걸식자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열악한 경제상황이었지요. 1994년 8월 청진시 수남구역으로 이사한 집에서 100m도 안 되는 곳에 공개처형장이 있었는데, 내가 본 것만 20명이 사형됐지요."

공공재산인 농장의 소를 훔쳐 먹었다거나 고압선의 주전선을 잘라 팔아먹은 경우라면 십중팔구 처형당했다.

"누구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워낙 배가 고프니까 어떤 집의 삼형제가 뭘 훔치려고, 18세짜리 막내는 망 보고, 큰아들은 쌀자루를 지고 나오고, 둘째가 집주인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식칼을 휘둘렀는데 잘못해서 그 집 주인이 과다출혈로 죽게 된 거예요. 결국 쌀자루가 터져 쌀알이 질질 흘러 누구네가 그렇게 한 건지 알게 된 거죠. 칼질한 둘째나 처형할 것이지, 셋 다 말뚝에 박아 총살했잖아. 한 집안의 아들들을 몰살시킨 거지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도무지 이 환경에선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시절 조혼한 막내딸 김지혜가 탈북을 하겠다고 나섰다. 김지혜가 접한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북한과 완전 딴판이었던 게다. 그래서 처 최○○에게 갓 낳은 아기를 맡기고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겠노라 했다. 당시 김지혜는 가정폭력 문제로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김지혜는 중국에서 갓 낳은 아기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200달러를 김씨 부부에게 보냈다. 돈을 벌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까서 써 보냈다. 그런데 동마다 배치돼 있던 보위지도원에게 꼬리가 잡혔다.

그 물건 어디서 받은 거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그러나 김씨는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편지가 발각돼 부인도 못할 처지가 된 게다. 그 일로 김씨는 보위부로 불려가 3일간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딸들이 북한으로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어요. 지혜가 보낸 물건들은 모두 압수 당했지요. 다 빼앗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것 신을 신발 하나만 돌려 달라고 매달렸더니, 그거 한 개는 주더라구요."

"우리 손주딸 신발만이라도..."

당시 상황을 떠올린 김씨는 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잘못해서 붙잡혀 조사받고 나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감옥도 갔고, 중국 공안에게 호송됐다가 다시 붙들려오면 온전치 못했다. 결국 도망을 쳐야 살 수 있었다.

2000년 지혜는 가족탈북을 기획했다. 북한에서 들통 나면 가족이 모두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해서 오라는 것이었다. 2000년 12월 30일 청진시 수남구역 인곡1동 40반에 살던 김씨 가족은 모두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김동순 내외, 막내아들과 손녀 정소연(3)은 결혼해 분가한 큰딸 원○○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대문에만 못을 친 뒤 집을 떠났다. 두만강 쪽 강변엔 눈이 하얗게 깔려 있었고 얼음이 단단히 얼어붙었다.

도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북한 경비병이 호위해줬고 안전하게 도강하면 그 자리에서 500달러를 건네받는 식이었다. 탈북한 뒤의 중국은 북한에서 생활한 것과 비교하면 호사스러웠다. 우선 먹을 게 많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보다 좋은 생활은 아니었다.

막내아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몇 날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젊은 남자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부족할 게 없었어요. 그러나 자유가 없었습니다. 막내아들은 툭하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둘렀고, 이렇게 살려면 뭐하러 중국에 왔느냐고 화를 냈지요. 우리 식구는 북한에서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자유 없이 중국에서 살거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처 최○○과 막내아들, 막내딸 김지혜와 외손녀 정소연은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결국 2001년 12월 31일, 이들은 1년 만에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내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대주로서 귀북하게 가면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고 더욱 살기 힘든 형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할 것이고, 사람들 앞에 서서 조리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지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거지가 되어도 다시는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요. 결국 나만 남고 가족들은 중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도로 북한으로 갔습니다."

먹는 것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가 없었다

김동순씨는 2006년 12월 28일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를 거쳐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검찰은 그가 북한 노동당 당원이며 인민군 정찰국 소좌(한국군의 소령)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의붓딸인 원정화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황장엽씨의 소재 파악에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으며, 미리 입국한 원정화가 황장엽의 소재 파악에 어려움을 겪자 "내가 찾아보겠다"며 직접 들어온 것이라고 소개했다.

검찰은 2002년 10월∼2006년 1월 김씨가 중국에 머물면서 북한산 냉동문어와 옻, 고사리 등 9억7000여만 원어치의 북한산 농수산물과 북한 작가의 그림 40여 점(6500달러 상당)을 원씨에게 전달했고, 이 돈을 원씨가 남한에서 공작금으로 썼다고 밝혔다.

2005년에는 원씨의 소개로 한국 정보요원인 이모씨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청진에 있는 로켓 공장 설계도를 그려 주고는 그 대가로 위조된 한국 여권을 넘겨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날조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간첩이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하나도 없으면서 오로지 원정화의 허위진술에 의존해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김씨는 "원정화의 전 계부로서 가장 접촉과 연계가 많았다는 것이 죄 아닌 죄가 된 것 같다"며 "원정화의 날조된 거짓진술에 의해 간첩이 됐다"고 개탄했다. 자신은 북한의 그 어떤 정탐기관에도 근무한 바 없으며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그 어떤 사소한 행위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2008년 7월 27일~9월 4일까지 약 두 달간 고강도 조사를 받으면서 독방에 수감된 채 24시간 CCTV 감시를 당하고 외인과 일체 접촉 금지, TV 시청과 신문구독 금지 등 사실상 육체적 고문을 제외한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했다고도 덧붙였다. 북한에서 어렵게 살아낸 것도 힘든데, 살려고 온 남한에서도 의붓딸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치도곤을 당해야 하느냐고 한탄했다.

무엇보다 그는 "원정화 사건을 마타하리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네 살 때부터 키운 원정화의 행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 정보계의 망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내 의붓딸이지만 원정화는 간첩질을 할 재목부터 되지 않는다"며 "북한에 살며 보고들은 풍문에 따르면 선발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어 "원정화는 중학교 중퇴 학력이 끝"이라며 "제 딸아이까지 내게 맡겨 키우게 했으면서 결국 계부를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트렸다"고 가슴을 쳤다.

대한민국 검찰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역사도 모르는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1945년 6월 계부가 월북했다고 주장하면 그대로 받아 인정하는 게 대한민국 검찰의 수준이냐"며 "1945년이면 38선도 없던 때인데 그때 월북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혀를 찼다. 자신은 지금 "불과 몇 페이지도 안 되는 진실을 두고 방대한 장광설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라며 "대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항소심의 무죄판결이 뒤집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그는 원정화 간첩사건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간 가족들이 화를 입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씨는 "간첩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한국에 와서 북한을 비난하는 조작사건의 제물이 됐는데 북한의 가족이 무사할 리 있겠느냐"며 "모두 죽였든지, 불모지역으로 끌려갔든지,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졌든지 셋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로 교화소는 지옥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여건이지요. 거기 갔다온 사람이 무사할 리 없어요. 원정화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됐는데 북한 지도부가 봐줄 리 없지요."

한 사람이 살아냈다고는 믿기 어려운 지독한 삶이다. 그는 오로지 살기 위해 전투했다. 지금도 자신은 간첩이라는 거대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지만 누명을 벗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대법원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확정판결이 내려지면 유엔인권위에 제소할 방침이라고 했다. 북한에 남은 가족과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고 했다.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간첩'이라는 색안경이 덧씌워져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원정화 #김동순 #마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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