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간첩 원정화 계부 김동순씨.
권우성
북한의 식량위기가 급격히 심화되던 1993년이었다. 김씨 부부와 아이 다섯, 어머니까지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누우면 한 뼘 정도 폭이 남을 정도였다. 도무지 한곳에 살 처지가 아니었던 게다.
"기벌이를 아시나요? 한 끼 벌어 먹고산다 하여 기벌이라고 합니다. 북한엔 기벌이라는 게 있었어요. 식량난이 워낙 심했으니까. 나는 출근할 때마다 볶은 콩 한 주먹씩 쥐고 갔고, 아이들도 그랬지요."그러던 차에 막내딸 김지혜가 혼인을 하게 됐다. 어부를 하면서 외화벌이 하는 정용희를 만나 1996년 열일곱의 나이에 조혼을 했다.
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식량난은 점점 심각해졌고, 무엇이라도 훔쳐 먹다 걸리면 처형당하는 일도 잦아졌다. 마을 한 가운데서 공개처형도 빈발했다.
"200만 가까운 아사자가 나왔어요. 유랑 걸식자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열악한 경제상황이었지요. 1994년 8월 청진시 수남구역으로 이사한 집에서 100m도 안 되는 곳에 공개처형장이 있었는데, 내가 본 것만 20명이 사형됐지요."공공재산인 농장의 소를 훔쳐 먹었다거나 고압선의 주전선을 잘라 팔아먹은 경우라면 십중팔구 처형당했다.
"누구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워낙 배가 고프니까 어떤 집의 삼형제가 뭘 훔치려고, 18세짜리 막내는 망 보고, 큰아들은 쌀자루를 지고 나오고, 둘째가 집주인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식칼을 휘둘렀는데 잘못해서 그 집 주인이 과다출혈로 죽게 된 거예요. 결국 쌀자루가 터져 쌀알이 질질 흘러 누구네가 그렇게 한 건지 알게 된 거죠. 칼질한 둘째나 처형할 것이지, 셋 다 말뚝에 박아 총살했잖아. 한 집안의 아들들을 몰살시킨 거지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도무지 이 환경에선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시절 조혼한 막내딸 김지혜가 탈북을 하겠다고 나섰다. 김지혜가 접한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북한과 완전 딴판이었던 게다. 그래서 처 최○○에게 갓 낳은 아기를 맡기고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겠노라 했다. 당시 김지혜는 가정폭력 문제로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김지혜는 중국에서 갓 낳은 아기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200달러를 김씨 부부에게 보냈다. 돈을 벌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까서 써 보냈다. 그런데 동마다 배치돼 있던 보위지도원에게 꼬리가 잡혔다.
그 물건 어디서 받은 거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그러나 김씨는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편지가 발각돼 부인도 못할 처지가 된 게다. 그 일로 김씨는 보위부로 불려가 3일간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딸들이 북한으로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어요. 지혜가 보낸 물건들은 모두 압수 당했지요. 다 빼앗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것 신을 신발 하나만 돌려 달라고 매달렸더니, 그거 한 개는 주더라구요.""우리 손주딸 신발만이라도..."당시 상황을 떠올린 김씨는 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잘못해서 붙잡혀 조사받고 나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감옥도 갔고, 중국 공안에게 호송됐다가 다시 붙들려오면 온전치 못했다. 결국 도망을 쳐야 살 수 있었다.
2000년 지혜는 가족탈북을 기획했다. 북한에서 들통 나면 가족이 모두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해서 오라는 것이었다. 2000년 12월 30일 청진시 수남구역 인곡1동 40반에 살던 김씨 가족은 모두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김동순 내외, 막내아들과 손녀 정소연(3)은 결혼해 분가한 큰딸 원○○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대문에만 못을 친 뒤 집을 떠났다. 두만강 쪽 강변엔 눈이 하얗게 깔려 있었고 얼음이 단단히 얼어붙었다.
도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북한 경비병이 호위해줬고 안전하게 도강하면 그 자리에서 500달러를 건네받는 식이었다. 탈북한 뒤의 중국은 북한에서 생활한 것과 비교하면 호사스러웠다. 우선 먹을 게 많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보다 좋은 생활은 아니었다.
막내아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몇 날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젊은 남자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부족할 게 없었어요. 그러나 자유가 없었습니다. 막내아들은 툭하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둘렀고, 이렇게 살려면 뭐하러 중국에 왔느냐고 화를 냈지요. 우리 식구는 북한에서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자유 없이 중국에서 살거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처 최○○과 막내아들, 막내딸 김지혜와 외손녀 정소연은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결국 2001년 12월 31일, 이들은 1년 만에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내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대주로서 귀북하게 가면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고 더욱 살기 힘든 형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할 것이고, 사람들 앞에 서서 조리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지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거지가 되어도 다시는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요. 결국 나만 남고 가족들은 중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도로 북한으로 갔습니다."먹는 것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가 없었다김동순씨는 2006년 12월 28일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를 거쳐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검찰은 그가 북한 노동당 당원이며 인민군 정찰국 소좌(한국군의 소령)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의붓딸인 원정화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황장엽씨의 소재 파악에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으며, 미리 입국한 원정화가 황장엽의 소재 파악에 어려움을 겪자 "내가 찾아보겠다"며 직접 들어온 것이라고 소개했다.
검찰은 2002년 10월∼2006년 1월 김씨가 중국에 머물면서 북한산 냉동문어와 옻, 고사리 등 9억7000여만 원어치의 북한산 농수산물과 북한 작가의 그림 40여 점(6500달러 상당)을 원씨에게 전달했고, 이 돈을 원씨가 남한에서 공작금으로 썼다고 밝혔다.
2005년에는 원씨의 소개로 한국 정보요원인 이모씨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청진에 있는 로켓 공장 설계도를 그려 주고는 그 대가로 위조된 한국 여권을 넘겨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날조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간첩이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하나도 없으면서 오로지 원정화의 허위진술에 의존해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김씨는 "원정화의 전 계부로서 가장 접촉과 연계가 많았다는 것이 죄 아닌 죄가 된 것 같다"며 "원정화의 날조된 거짓진술에 의해 간첩이 됐다"고 개탄했다. 자신은 북한의 그 어떤 정탐기관에도 근무한 바 없으며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그 어떤 사소한 행위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2008년 7월 27일~9월 4일까지 약 두 달간 고강도 조사를 받으면서 독방에 수감된 채 24시간 CCTV 감시를 당하고 외인과 일체 접촉 금지, TV 시청과 신문구독 금지 등 사실상 육체적 고문을 제외한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했다고도 덧붙였다. 북한에서 어렵게 살아낸 것도 힘든데, 살려고 온 남한에서도 의붓딸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치도곤을 당해야 하느냐고 한탄했다.
무엇보다 그는 "원정화 사건을 마타하리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네 살 때부터 키운 원정화의 행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 정보계의 망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내 의붓딸이지만 원정화는 간첩질을 할 재목부터 되지 않는다"며 "북한에 살며 보고들은 풍문에 따르면 선발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어 "원정화는 중학교 중퇴 학력이 끝"이라며 "제 딸아이까지 내게 맡겨 키우게 했으면서 결국 계부를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트렸다"고 가슴을 쳤다.
대한민국 검찰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역사도 모르는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1945년 6월 계부가 월북했다고 주장하면 그대로 받아 인정하는 게 대한민국 검찰의 수준이냐"며 "1945년이면 38선도 없던 때인데 그때 월북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혀를 찼다. 자신은 지금 "불과 몇 페이지도 안 되는 진실을 두고 방대한 장광설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라며 "대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항소심의 무죄판결이 뒤집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그는 원정화 간첩사건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간 가족들이 화를 입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씨는 "간첩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한국에 와서 북한을 비난하는 조작사건의 제물이 됐는데 북한의 가족이 무사할 리 있겠느냐"며 "모두 죽였든지, 불모지역으로 끌려갔든지,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졌든지 셋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로 교화소는 지옥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여건이지요. 거기 갔다온 사람이 무사할 리 없어요. 원정화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됐는데 북한 지도부가 봐줄 리 없지요." 한 사람이 살아냈다고는 믿기 어려운 지독한 삶이다. 그는 오로지 살기 위해 전투했다. 지금도 자신은 간첩이라는 거대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지만 누명을 벗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대법원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확정판결이 내려지면 유엔인권위에 제소할 방침이라고 했다. 북한에 남은 가족과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고 했다.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간첩'이라는 색안경이 덧씌워져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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