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의술도 거품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으니 강의 딸이여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소서.
이 문장을 읽고 무슨 이야기 인지 알고 피식하고 웃은 사람은 신화에 관해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적어도 문제를 낸 사람 보다는 맞춘 사람이 더 대단한 법이니까.
지금 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신 아폴론(의술의 신이기도 하다.)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품의 아들이라 함은 흔히 큐피트로 알려진 장난꾸러기 신 에로스의 또 다른 별명이다. 그의 어머니 아프로디테(베누스)는 크라로스가 잘랐던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나온 거품에서 태어났기에 생긴 별명을 의미한다.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자신과 누이를 임신했을 때의 어머니를 끝없이 괴롭히던 괴물 튀폰을 그의 멋진 활솜씨로 죽였고 이 영웅적인 행적을 기념하여 퓌티아 대회가 열리는 등 자랑스럽고 기쁜일이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양양한 포이보스의 눈 앞에 화살을 든 아기 신 에로스(쿠피도)가 지나가자 오만하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포이보스가 말을 걸었다.
"이봐 에로스, 그저 사람의 마음에 쓸때 없는 음심이나 생기게 하는 애송이에 불과한 너한테 활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활은 나같은 전사들이나 사용하는 거라고. 보통 '사랑의 불씨를 당긴다.'라는 말을 사용하니까 넌 차라리 횃불이나 사용하지 그래?"
이 말에 완전히 발끈한 에로스... 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에로스는 모든 신의 어머니 가이아의 동생뻘되는 신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폴론이 마음대로 무시하고 희롱해도 되는 신이 아니었다. 올림푸스에 있는 많은 신들 중 제우스 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신이 딱 둘 있었으니 하나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려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리아스 여신 세자매 였고, 그 나머지 하나가 방금 아폴론에게 모욕을 당한 아기 신이었다.
하지만 아직 사랑의 아픔도 무서움도 모르는데다가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 뛰어난 예언 능력에도 불구하고 방금 자신이 한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신과 동물 중에 누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당연히 신이지."
"아저씨와 나 사이에는 신과 동물 만큼의 영광이 차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뭣이?"
"아저씨의 활은 기껏해야 동물이나 사냥할 뿐 신에게는 사용하지 못하죠.
하지만 제 활은 신을 맞출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렇게."
분노한 에로스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화살통에서 두개의 화살을 꺼내 그 중 하나를 아폴론의 가슴에 쏘았다. 그 유명한 큐피트의 화살을 심장에 맞은 아폴론의 눈에 띈 것은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디프네였다.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에로스의 법칙에 따라 아폴론은 그녀를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이를 본 에로스는 피식하고 한번 웃어 주고는 또 하나의 화살을 디프네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이번 화살은 화살촉이 금빛이었던 아폴론을 겨냥했던 것과 달리 그 화살촉이 검은 납으로 된 것이었다. 이 화살을 맞은 이는 처음 눈이 마주친 이성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디프네를 보고 강한 사랑을 느껴 끝 없이 달려가는 아폴론과 그런 아폴론을 발견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 달아나는 디프네. 시와 음악의 신답게 아폴론은 그런 디프네를 쫓아가면서도 달콤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아가씨여 부디 그 자리에 서주기를 바라오.
재미 삼아 당신을 희롱하거나 해하려는 불한당이 아니오.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들 포이보스 아폴론이 나의 이름이라오.
미래를 아는 힘 있지만 당신에게 빠져버릴 나의 운명 알 수가 없었네
아름다운 칠현금을 연주하는 능력있지만 지금 그대의 눈부심 앞에서는 부끄러운 소리일 뿐이네
이 세상 누구 보다 더 정확한 활 솜씨있지만 나 보다 더 뛰어난 녀석의 장난질로 지금 내 눈에는 세상 누구 보다 아름다운 그대만 보인다네.
세상의 모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있지만
지금 내 가슴의 이 아픔 치유할 약을 만들 방법은 없다네
이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사랑스러운 아가씨여
태양 보다 빛나는 이성의 신 아폴론이 바로 나란 말이오.
아름다운 요정 페네이오스의 딸이여.
제발 그 자리에 멈춰 나의 이 불타는 마음을 받아주오.
하지만 디프네에게는 징그러운 수컷 한마리가 자신을 능욕하기 위해 쫓아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열심히 열심히 도망쳤지만 여자의 몸으로 천하의 아폴론을 따돌릴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녀는 아버지 페네이오스 강 앞에서 아폴론에게 잡히기 직전의 위기를 겪게 된다.
앞에는 깊은 강 뒤에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불한당(그녀가 보기엔) 그야 말로 어찌 할 수 없는 절채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디프네는 강을 향해 기원을 한다.
"아버지 페네이오스여, 당신의 딸이 몸을 망칠 위험에 빠졌습니다. 당신에게 권능이 있다면 나를 구원해 나의 몸을 변화시켜 주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 주소서."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폴론의 따스한 손이 다프네의 어깨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가늘고 길던 다리는 땅 속으로 들어갔고 희고 부드럽던 피부는 녹색빛을 띄었고 아름다운 젖가슴은 잎파리로 덮였다. 다프네는 월계수 나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폴론은 나무가 된 다프네 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월계수 나무에 입을 맞추고나서 아폴론은 나직히 속삭였다.
"사랑하는 다프네여, 이제 나의 아내가 될 수 없지만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구나. 이제 그대는 나의 칠현금에 활에 그리고 나를 기념하는 빛나는 머리에 늘 존재할 것이고 나의 영광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 나타나리라."
아폴론의 말이 끝나자 나무는 마치 감사의 뜻을 표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 가지를 빛나는 자의 앞에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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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이 아무리 잘나가도 자기 보다 강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처음 읽었던 그리스 신화에서 이 이야기는 이런 말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설령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하더라도 신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제발 되지도 않는 윤리관 만은 끌어들이지 말자. 서양의 모든 윤리학의 시초를 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대에 그리스 신화는 이미 근간이 끝나있었다.
신화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는 아직 윤리라는 옷을 입기 전의 순수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여기에 현대인의 윤리관을 마구 대입한다면 신화는 그저 그런 동화책 한권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만약 이 이야기의 의미가 '아폴론의 오만함에 대한 에로스의 보복'이라면 이 신화는 절대 전승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소설이나 이야기책이 아닌 현재의 바이블이나 코란과 같은 종교 그 자체인데 델포이를 비롯한 그리스의 유력한 도시들에서 숭상되던 신 아폴론이 잘난 척 하다가 골탕먹은 이야기가 어찌 그대로 존재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아폴론의 상징목이자 승리자의 머리를 장식해 주던 월계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까지 남아 있다면 적어도 아폴론의 어리석음 외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폴론과 다프네의 비화는 이성으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음을 우화적으로 나타낸 이야기이다.
아폴론 신이 누구인가.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의 1세대 신들의 뒤를 잇는 2세대 신의 선두주자이다. 비록 제우스의 서자이긴 하지만 적자인 헤파이스토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는 엄청난 질투로 구박을 해대는 신들의 어머니 헤라라 마저도 아폴론에게 만큼은 구박은 꿈도 못 꾸고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한다.
관장하는 것들은 또 어떤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신성시 했던 예언, 의술을 비롯해서 음악, 미술, 궁술, 시 등의 모든 예술 그리고 가장 빛나는 이성의 신이기도 하다. 심지어 태양의 신인 헤시오스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나는 이성 덕분에 포이보스(빛나는 자라는 뜻)의 칭호를 얻은 아폴론은 후기 신화에서는 아예 태양신의 자리까지 점령해 버린다. 신들의 왕은 제우스이지만 그 실권은 아폴론에게 이미 넘어가 있는 셈이다.
2세대 신 중 그와 비교 될만한 남자 신은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정도인데 권력이나 세상사에는 관심 없고 자기 일하는 재미로만 사는 헤파이스토스나 강한자에게 빌붙을 궁리나 하는 전령 역할의 헤르메스는 애초에 아폴론의 상대가 아니다. 아폴론의 유일한 라이벌이라면 디오니소스 정도인데 올림푸스 12신 중 데미테르와 함께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 남은 신은 아폴론에게 대항은 할지언정 대등한 입장이 될 수는 없다. 기껏해야 1년 365일에서 3~4일 정도 디오니소스 축제로 그 빛나는 이성 대신 술의 신의 광기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양보를 받아 낼 뿐이다.
정리하자면 아폴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권력 승계 과정을 거의 끝내 놓은 올림푸스의 황태자이며 지위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한 능력으로도 누구에게 비할 것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예술과 수렵에도 최고를 자랑하는 쉽게 얘기하면 올림푸스에서 최고 킹카이다(절름발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제외하면 그리스 신들에게 외모는 기본 사양이다. ^^)
다프네는 외모야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신도 아닌 요정이기에 감히 올림푸스 산에 오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쉽게 얘기하자면 올림푸스 파티에서 아폴론이 마실 술을 가져오는 시종 역할을 맡은 이 보다도 지위가 낮다는 얘기이다. 이런 그녀에게 로또 복권 보다도 더한 행운이 다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설령 죽을 지언정 그런 아폴론이 싫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거부하는 것 역시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나...?
이제는 지겨울만도 한데 계절만 바뀌면 또 나오는 신데렐라형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데는 이미 수천년 전 부터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저장되어 있는 신화소를 소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또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가장 빛나는 이성의 신 아폴론의 행동이다.
사랑을 우습게 알고 자신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의 오만이 깨졌다고는 해도 사랑하는 디프네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미숙하기 짝이 없다. 가장 지혜로운 신인 아폴론이 에로스 신의 장난에 가까운 함정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가기에 앞서 성별이 남성인 친구를 먼저 보낸다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나가는 인간 남성 한명을 잠시 납치해도 그만이다. 도망가는 그녀를 무작정 쫓아가는 것 보다 아버지 제우스 신을 통해 정식으로 청혼하는게 훨씬 유리 하다는 것을 이성의 신이 몰랐을까.
사랑은 무서운 것이다.
하찮고 별볼일 없어보이는 아기신 에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신을 일순간에 앞뒤 분간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신보다 떨어지는게 많은 상대이지만 에로스의 화살에 맞는 그 순간 그대의 파트너는 이 세상을 다 희생시킨다해도 얻고 싶은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제 아무리 냉철하고 많은 지혜를 가진 이라도 예외 일 수 없다. 이성은 그 강렬함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로고스에게도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천적이 딱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재미있고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룰로 가득찬 로고스의 세상에서 언제 터질지 모를 죠커를 가질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을 시작하려는 이여. 그 동안 언제나 당신의 편이었던 이성을 잠시 벗어놓고 한번 쯤은 진정한 가슴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라. 나름대로 전략을 세우고 이것 저것 따져봐야 한 걸음 물러선 거리에 있는 이가 보기에는 평소의 당신에게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조약하고 유치한 것들일 뿐일테니까. 자신의 가슴에 충실함의 증거인 그 유치함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말라.
끝 모르고 타오를 수 있는 가슴이 남은 자신의 건강함과 그 유치함에 기꺼이 동참해준 사랑하는 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사랑을 해서는 안되는 입장에 처한 이라면 에로스 신이 자신에게 만큼은 못된 장난질을 자제하도록 간절히 기원하라.
신화 최고의 킹카인 아폴론 신의 실패한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스인 모두의 축제인 올림픽의 꽃과 함께 아름답게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수천년 전 부터 인류는 이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꿈꾸고 동경해 왔다는 증거인지도 모를 일이다.
2010.08.31 10:44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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