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평화를 해치는 무기로 사용할 셈인가

[주장] 생색내기 수준의 쌀 지원은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 안 돼

등록 2010.09.10 20:20수정 2010.09.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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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구호단체들은 종종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무장 대결 상황에서는 총과 폭탄처럼 배고픔과 목마름도 역시 죽음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에서 구호단체들이 해야 하는 일은 총과 폭탄을 막아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고한 민간인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접근이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연장시키고 평화를 저지하려는 무장단체나 군사정권을 돕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과 무장단체는 구호단체가 지원하는 식량을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하고, 식량 보급로를 열어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며, 식량 반입을 조건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협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구호단체들이 상세한 현장 상황을 알지 못해 의도와는 다르게 난민 속에 숨은 전범들을 돕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일은 굳이 특정 지역 또는 국가를 지목할 필요도 없이 많은 구호 현장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구호단체들은 인도주의에 근거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식량을 지원하고 분배하며 동시에 구호 활동이 무장단체 또는 독재자를 돕거나 전쟁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대응 전략과 예방 대책을 개발한다. 인도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든 배고픔과 목마름 등 극한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홍수 피해를 겪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함에 있어 쌀을 지원 품목에 넣을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정부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이런 인도주의 정신의 근간을 생각해봐야 한다.

 

정부는 북한 홍수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북한의 지원 요청에 답하기 위해 100억원 규모에 달하는 구호물자를 북한에 지원할 계획을 밝혔다. 남북관계 경색으로 그동안 거의 중단됐던 인도적 지원을 홍수 복구 지원을 계기로 재개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부는 쌀을 대량 지원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통일부 장관은 북한에 쌀 1만 톤 정도를 보낼 생각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홍수 피해 복구 지원 물품 중 쌀을 지목했으니 안 보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많이 보낼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2007년까지 남한이 북한이 한 해 수십만 톤의 쌀을 보냈던 것과 크게 비교된다.

 

남한 사람들에게 그렇듯 북한 사람들에게도 쌀은 주식이다. 그런데 홍수 피해를 겪은 사람들에게 주식인 쌀은 못 준다는 얘기다. 물론 북한 사람들은 평소에도 풍족하게 쌀을 소비하지 못했으니 언감생심 쌀을 바라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는 처지에서는, 그것도 인도적 지원을 하는 처지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예의고 도리에 맞는 일이다. 더군다나 북한이 자존심을 접어두고 직접 쌀을 요청했는데도, 남한의 창고마다 쌓여 있는 쌀은 그대로 묵혀 동물 사료로 쓰거나 술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에 줄 쌀은 없다는 것이 정부와 많은 여당 의원들의 견해이다. 그런데 보도된 여당 의원들의 주장은 쌀을 대량으로 주기 힘들다는 견해를 정당화하기에는 논리가 빈약하거나 설득력이 없다.

 

북한에 쌀을 주느니 동물 사료로 쓰는 게 낫다?

 

한 여당 의원은 "북한에서 쌀은 전략물자이자 군수물자다. 쌀이 북한으로 가면 군량미로 전용되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쌀이 전략물자이자 군수물자가 될 수도 있는 이유는 쌀이 주식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북한으로서는 제일 먼저 군대를 먹일 식량을 확보할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쌀 지원이 이뤄지면 군량미로 전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쌀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사실 군량미 전용 의혹은 식량 지원 얘기가 있을 때마다 나오는 논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군대를 먹일 만큼의 쌀은 충분히 생산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쌀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굶주리게 되는 것은 결국 민간인이라는 반론도 항상 힘을 얻는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의 상황을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라크에 대한 10여 년의 경제제재로 피해를 본 것은 권력자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군대가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이었다. 다른 많은 독재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이유로 외부 지원이 끊기면 항상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권력자들과 정치적 필요 때문에 특별히 보호받는 군인들이 아니라 민간인들이다.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쌀이 간다면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한 여당의원의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기에 앞서 투명성을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주장이다. 정부의 쌀 지원 근거가 인도적 지원인만큼 북한에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고 북한이 만족할 수 있는 만큼의 쌀 지원이 이뤄진다면 그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쌀 1만~2만 톤을 보내면서 투명성을 주장한다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 것이고 투명성도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돈 10만원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써달라고 하면 원칙적으로는 맞는 얘기지만 빌리는 쪽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이치와 같다.

 

쌀 지원과 투명성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도적 지원이지만 북한과 정치적 관계를 고려해 상호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투명성 확보에 합의하는 것이다. 북한에 최대한 투명성을 확보해주도록 요청하되 그것을 증명할 자세한 결정은 북한에게 맡겨두는 것 등이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투명성 확보가 중요하다면 직접 지원과 유엔 세계식량계획(UN WFP)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 지원을 병행하는 것이다. WFP는 평양과 지방에 상주 사무실들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전략적 지역을 빼고 북한 전역에 걸쳐 식량 분배와 모니터링을 위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 한국 정부도 2007년까지는 WFP 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에 대한 간접 지원을 했다.    

 

"한국 사회에 기초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250만 명이 있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는 여당 의원도 있었다. 

 

이것은 북한을 돕기 전에 국내 극빈층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원으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국내 극빈층이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답하는 정책적 결정과 제도적 뒷받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이지 쌀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현재 창고마다 쌀이 쌓여 있고 올해 추수 물량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인도적 지원은 인도주의에 근거해 이뤄지는 지원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목적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는 인도적 지원도 일종의 정치적 결정이므로 북한 쌀 지원을 두고 공통의 기반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진심으로 인도적 지원의 의지가 있다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 정치권과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북한 쌀 지원을 통한 인도적 목적의 달성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설사 그 쌀이 조금 군대로 갈지라도 앞서 언급한 구호단체들의 선택처럼 최소한 굶주리는 사람들의 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에 기여하는 것은 모두 아는 것처럼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등을 돌렸던 남과 북이 쌀을 포함한 구호물자 지원을 계기로 대화에 임할 수 있는 명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자존심을 접고 직접 쌀을 지목했음에도 생색내기 수준에서 쌀을 지원한다면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한반도의 평화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적 공존관계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쌀 차관과 지원을 시작한 이래 한국 정부는 남북대화 정체기인 2001년과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2006년을 제외하고 매년 30만~50만 톤의 쌀 차관을 제공했다. 2006년에도 수해 지원 명목으로 쌀 10만 톤을 무상 기증했다. 또한 WFP 등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지원도 꾸준히 해왔다. 같은 시기에는 한 해 15만~40만 톤의 비료 지원도 해왔다.

 

한 해 수십만 톤씩 쌀과 비료 지원이 이뤄지던 시절에는 북핵 위기 상황 등이 있었지만 남북관계가 파국까지 치닫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꾸준히 대화 통로를 유지했다. 덕분에 남북의 평화적 공존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고 남북 대결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도 적었다. 그러나 그 후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대북 식량 지원이 끊기고 대화 통로가 닫히면서 국민들은 평화적 공존은 생각할 수도 없고 남북 무력 충돌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쌀이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반대로 쌀을 평화를 해치는 무기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로서는 무책임한 행동이며 동시에 정치적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0.09.10 20:20ⓒ 2010 OhmyNews
#북한식량지원 #대북지원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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