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하늘의 계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영웅 안중근 9] 첫째마당 -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다

등록 2010.09.24 13:46수정 2010.10.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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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비얀카항 전경, 러시아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미항으로 휴양지이기도 하다. ⓒ 박도


슬라비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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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비얀카' 지명 표지판 나의 오랜 항일유적답사 체험에 따르면, 답사여행 중 가장 반가운 것은 찾아가고자 하는 지명 표지판이 눈에 띌 때다. ⓒ 박도

조금 달리자 '슬라비얀카'라는 지명이 나왔다.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지만 예감에 슬라비얀카일 것 같아 안내인 조씨에게 확인하자 맞다는 대답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문헌으로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더듬은 터라 눈에도 귀에도 익은 지명이다. 이 표지판을 보는 반가로움이란.

100년 전인 1909년 10월 18일, 안중근 의사가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항구가 아닌가.

하늘이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라는 계시였을까? 그 무렵 안중근은 포시에트(木許隅, 목허우)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하루 괜히 마음이 울적하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어 바람을 쐬러 항구에 나갔다.

때마침 일주일에 한두 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가 10월 18일 밤에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중근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여행을 떠날 차비를 차렸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작별을 하고 슬라비얀카(옛 보로실로프) 항에 이르자 마침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가 출항 직전이었다. 안중근은 곧장 이 배를 탔다.

저녁놀에 비친 슬라비얀카 항구가 매우 아름다웠다. 조씨는 언덕에서 손으로 항구를 가리키고는 곧장 차를 돌리려고 하는데 나는 굳이 부두 승선장까지 가자고 했다. 그 자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 부두 매표소에 갔더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 시간이 붙어있는데 오전 11시와 오후 3시 하루 두 차례 운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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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매표소 슬라비얀카~블라디보스토크 여객선 매표소 및 대합실 ⓒ 박도

나중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도 확인했지만 슬라비얀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배는 승용차도 실어 나르는 꽤 큰 배였다.

내가 출국 전에 조씨에게 거기서 이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겠다고 배 운행 여부와 시간을 문의했다. 하지만 그는 현지사정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한 마디로 승용차는 탈 수도 없고, 배도 자주 없다고 답을 하기에 이 여정은 포기했다.

늘 해외여행이나 답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동포 가이드들은 대충대충 넘기려하고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점이다. 그러면서 "거기 가 봐도 별 것 없다"라고 하면서 답사자의 요구를 일방으로 꺾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해외 동포뿐 아니라 우리 백성들의 마음속에 뿌리잡고 있는 대충주의요, 적당주의다. 이 대충주의, 적당주의 때문에 우리나라가 선진 일류국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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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비얀카 승선장 100년 전 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 부두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배에 올랐다. ⓒ 박도


그물코 세상

다시 승용차에 탔다. 그새 땅거미도 지기 시작했다. 조씨는 자기 소개와 함께 살아온 얘기를 했다. 자기는 사할린동포 2세로 아버지 고향은 경북 청송이라고 했다. 당신은 할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로 사할린에서 모스코바대학에 유학하여 그곳 화학공업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 고합지사로 옮긴 뒤, 10여 년 근무하고는 은퇴했다고 했다. 고합 장치혁 회장이 연해주 출신 독립운동가 장도빈의 아들로 극동대학을 설립하는 등, 이곳 독립운동기념사업에 힘썼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한국 독립운동관계자들을 여러 번 안내하게 되어, 은퇴 후에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방문하는 러시아 현지 독립운동 관계 한국인들을 안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원대 박환 교수를 비롯하여 한국독립운동사 학자와 광복회 보훈처 전현직 인사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마침 나의 첫 중국 항일유적답사에 전 비용 및 안내인까지 주선해 준 이영기(전 전주지검장) 변호사가 사할린동포 법률구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마침 내가 그 일을 정리하였기에 그때 기억에 남은 인사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 모두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특히 임종구씨는 한때 하얼빈에 안중근 동상을 세우는 일을 기획하면서, 나에게 국민성금 모금운동에 앞장 서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었다. 임종구씨는 일제강점기 때 집안을 위해 이름을 속이고 형의 징용장을 대신 가지고 사할린에 갔던 이라, 그의 별난 인생을 오마이뉴스에 기사화한 일이 있었다. 사실은 이번 답사에 그분과 동행하려고 출국 전에 연락했더니 부인이 그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관련기사; 한 사할린 동포의 마지막 꿈 2005. 7. 17.).

조씨는 나를 통해 임종구씨의 운명 소식을 듣고는 세상은 마치 그물코처럼 얽혔다고 놀라워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가며 거짓말하거나 죄를 짓고 살기 어렵다는 말에 서로 공감했다. 조씨는 부인이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이라 사할린동포 1세대로 인정받아 곧 한국으로 영구 이주할 거라고 하면서, 나에게 한국사회의 실정을 꼬치꼬치 물었다.

러시아 여인

도착 후 유적지를 바쁘게 돌다가 보니 그만 점심을 놓쳤다. 자동차에 주유도 할 겸 한 휴게소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음식을 장만하는 러시아 여인이 매우 아름다웠다. 사진 한 컷 찍어도 괜찮으냐고 양해를 구하자 그는 좋다고 대답하고는 마주 쳐다보기가 부끄러운 양 계속 눈을 내리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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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인 ⓒ 박도

모든 생명체는 어릴수록 아름답지만 사람, 특히 백계 러시아 여성은 더욱 그렇다. 러시아 어린 소녀들은 인형처럼 귀엽지만 40대를 넘으면 거의 대부분이 몸매가 드럼통이 되고 말씨도 거칠어진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호텔에 들려고 했으나 조씨는 굳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미 부인에게도 말해 두었다고 하면서 식구도 없고 2층은 텅 비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늦은 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면 30분 이상은 걸리고 내일 아침 또 시간 낭비한다고 하여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사실 여행자들은 안내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해외 관광객들이 뻔히 알면서도 가이드 말에 따라 쇼핑을 하는 것은 그들 말을 듣지 않으면 즐거워야 할 여행이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조씨의 집은 블라디보스토크 교외 주택가로 조용했다. 부인은 함경도 성진(현, 김책) 사람이라고 했다. 2층에다 여장을 푼 뒤 손을 닦고 내려오자 저녁 밥상이 얌전히 차려져 있었다. 바닷가 도시답게 반찬도 해산물이 많았는데 그들 내외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했다. 오랜만에 가자미 식혜를 맛있게 먹었다.

내가 교직에 있을 때 퇴근길 서울 신촌 네거리 '함경도 아바이' 대포 집에 들르면 주인이 단골이라고 특식으로 맛보여주던 그 맛이었다. 집안 가전제품이 대부분 한국제품으로 부인은 한국 텔레비전을 켠 채 연속극에 빠져 있었다. 위성 방송으로 한국방송이 거의 다 잡힌다고 했다. 그들 부부는 러시아 방송보다 한국방송을 더 많이 본다면서 탤런트 이름도, 연속극 내용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조씨는 또 나에게 한국 현실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아마도 그는 한국생활을 준비하는 듯 이것저것 물었는데, 그 질문에 꼬리를 계속 이어갔다. 나는 몇 마디 대답하다가 잠이 비 오듯 쏟아져 다음날 이야기하자고 미루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이날도 긴 하루였다.

안중근 행장(8)

그때 나는 연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마음이 울적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진정키 어려워 친구 몇 사람더러
"나는 지금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하오."
하였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러는 것이오. 아무런 기약도 없이 갑자기 가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저절로 마음에 번민이 일어나서,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고 있을 수가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
하였다.

그들은 다시 묻기를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무심중에 갑자기 대답하기를
"다시 안 돌아오겠소."
라고 말하자 그들은 무척 이상히 생각했을 것이며,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 보로실로프(穆口港, 지금의 슬라비얀카)에 이르러 기선을 만나 올라탔다.
- <안응칠 역사> 163~164쪽
#안중근 #슬라비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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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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