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걷는 즐거움

[그림책이 좋다 93] 마쓰나리 마리코, <길 잃은 도토리>

등록 2010.10.05 18:28수정 2010.10.0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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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도토리
 (마쓰나리 마리코 글·그림,고향옥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7.4.25./8000원)

숲길을 거닐다가 도토리 한 알 주워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앙증맞으면서 고운가를 압니다. 이 앙증맞으면서 곱고 작은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우람하며 씩씩하고 튼튼하게 크는가를 올려다보면서 자연이란 무척 놀라우며 거룩한 줄을 새삼 깨닫습니다. 따로 누군가 나무를 심어 자라는 도토리나무가 아닙니다('도토리나무'라고 했지만, 졸참나무나 떡갈나무나 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라고 낱낱이 이름을 들어 말해야 맞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떨구거나 다람쥐가 먹으려고 갉다가 떨어진 씨앗이 제힘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도토리나무입니다(그렇다고 땅에 떨어지는 모든 도토리가 뿌리를 내리며 나무로 자라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수많은 도토리 가운데 고작 몇 알이 겨우 뿌리를 내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나무로 자라나는 도토리는 몹시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이 대단하며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도토리 한 알은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 길디긴 나날을 제힘으로 조용히 큽니다. 씨앗 한 알이 어린 싹이 되고, 어린 싹이 어린나무가 되며 어린나무가 차츰차츰 우람한 어른나무로 뻗습니다.

 겉그림.
겉그림.청어람미디어
일본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들여다보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를 쉽게 만납니다. 한국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살피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가로지르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곧잘 만납니다. 한국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즐기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는 일본에서 2002년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2007년에 옮겨집니다. 도토리 한 알을 알뜰히 아끼며 좋아한 아이 하나가 숲속에서 얼마나 신나게 '도토리 놀이'를 했는가를 보여주다가는, 그만 숲속에서 잃은 도토리가 아이 품에서 떨어진 채 여러 해를 보내며 열 몇 해 뒤에는 그예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새삼스레 다시 만나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참 일본사람 그림책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참 한국사람은 이런 그림책을 못 그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일본이라고 해서 오늘날 시골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숲속을 한참 가로지르며 즐길까 궁금합니다만, <녹차의 맛>이나 <워터 보이즈>나 <스윙 걸즈> 같은 영화를 보노라면 자연을 벗삼은 학교가 고스란히 이어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나라를 돌아보면 큰도시에서는 아주 마땅하게도 자연이란 눈꼽만큼도 없으며, 작은도시는 큰도시 뒤를 따라 자연을 짓밟습니다.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라면 자연을 둘러싸거나 자연을 품에 안을 만하지 싶은데, 자연과 가까운 작은 학교는 거의 모조리 문을 닫았고,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시골에서 시골다움을 느끼며 학교를 다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흙길을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며 오가는 아이는 몇이나 될까요.


시골 학교를 다니는 한국 아이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달린다 하여도 아스팔트길로 다닐 테고, 이 길은 자동차가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느라 아슬아슬하다며 어버이가 자가용을 태우거나 학원버스나 학교버스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지 않나 싶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논밭이 가득한 시골길이나마 차분하게 즐기며 맞아들이는 가슴은 몇이나 될까요.

.. 준비 땅! 코우가 소리쳤어요. 우리는 떼굴떼굴 떽떼굴 구르며 코우랑 달리기 시합을 해요. 신나게 코우랑 놀아요. 어항을 겨누어 탕. 휘익 날아갈 때 기분 최고!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코우는 나를 찾으러 와 주어요. 엉덩이만 보면 알아요 ..  (6∼9쪽)


그런데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를 보며 어딘가 얄궂어 자꾸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이가 숲속에서 '도토리 던지기' 놀이를 하는데 어항을 겨누어 던집니다. 다른 데도 아닌 숲속에서. 숲속에 웬 어항? 숲속이라면 벼락을 맞아 쓰러진 나무에 난 구멍이라든지 딱따구리가 파 놓은 구멍이라든지를 이야기해야 걸맞지 않을는지요.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이 어린 날 숲속에서 '버려진 어항'을 보고는 오래도록 신나게 놀던 일이 있었기에 뜬금없이 숲속 어항을 보여주는가요.

게다가 번역이 영 못마땅합니다. "준비 땅!"이라니요. 일본말 "요이 땅!"을 "준비 땅!"으로 옮긴다고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준비 시작!"처럼 옮길 때에도 우리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말로 적바림하자면 "하나 둘 셋!"이라 하거나 "자, 달린다!"라 해야 알맞습니다. '시합(試合)' 같은 일본 한자말은 이 그림책뿐 아니라 운동경기를 말하는 사람들 누구나 아주 함부로 잘못 씁니다. 이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긴 한 사람을 탓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림책을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 '시합' 같은 일본말은 '내기'나 '겨루기'로 손질해 주어야 합니다. "기분 최고!"라는 대목 또한 일본책을 제대로 못 옮긴 말마디가 아닐까 싶은데, "아슬아슬 짜릿짜릿!"이나 "시원시원 좋아좋아!"처럼 말느낌이나 말맛을 살리며 옮겨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번역 말썽은 "코우의 집"이나 "코우의 발소리"나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데에서도 엿봅니다. 우리 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코우네 집"이요 "코우 발소리"이며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듯해서요"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까지 '-의'를 마구 넣는 버릇은 털어야 하며, '것'을 섣불리 자주 쓰는 매무새 또한 가다듬어야 합니다. 책 끝에는 "가끔씩 코우가 여기에 와서"라는 대목이 있는데, '가끔씩'처럼 적으면 틀립니다. '가끔'이라고만 적어야 올바릅니다. '가끔'과 '이따금'이라는 낱말 뒤에는 '-씩'을 붙일 수 없는데, 이를 깨달으며 알맞춤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쓰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이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가누지 못하면서 어린이책을 쓰고 어른책을 내놓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넋을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말에 실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삶을 일구고자 하는 어린이로 크도록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춥니다.

.. 코우의 가방 속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의 씨앗. 나무의 아기 ..  (4쪽)

이 대목 또한 "코우 가방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가 맺은 씨앗. 나무가 낳은 아기."로 고쳐야 알맞습니다. "가방에 든 도토리"이지 "가방 속에 든 도토리"가 아닙니다. 뒷 대목은 "모두 나무 씨앗. 나무 아기"로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번역을 깔끔하며 정갈하게 했어야 <길 잃은 도토리>라는 그림책이 한결 빛났을 텐데, 차분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몹시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뜬금없는 숲속 어항'이라든지 '도토리 한 알이 아이한테 지나치게 얽매인 줄거리 흐름'이라든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그림책 모습으로는 코우라는 아이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얼굴인데 기껏 열 해 남짓 지났어도 도토리나무가 그림책에 나오듯 이토록 우람하게 가지가 우거질 수 있나 궁금합니다. 코우라는 아이가 '어린 날 코우만 한 나이인 아이와 함께 도토리나무 앞에 선 모습'쯤으로 그려 주어야 어느 만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텐데요.

그래도 일본에서는 일본 어른들이 숲길 걷기와 숲속 도토리 한 알을 잊지 않고 그림책 하나로 알뜰살뜰 엮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베푸는 그림책이란 오로지 지식과 정보 그림책에 머뭅니다. 살갑게 부대낄 이야기 하나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숲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끄트머리 하나라도 붙안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니는 오솔길조차 아닌, 멧짐승만 지나다녔을 숲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나뭇가지를 쓰다듬는 느낌을 담지 못합니다. 가랑잎 흐드러진 숲길을, 나뭇잎이 바람을 맞으며 내는 소리를, 숲속에 깃든 짐승과 벌레가 내는 소리를, 나뭇잎 사이를 스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송보송해서 손가락을 눌러도 쏘옥 들어가는 좋은 흙을 그림책에 살포시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책이름이 <길 잃은 도토리>인데, "길 잃은"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토리로서는 길을 잃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도토리로서는 제자리를 찾아 '하늘이 내려진 고마운 선물' 그대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우람한 나무 한 그루로 자랍니다(좀더 제대로 말하자면, 도토리 한 알이 나무로 자라자면 다람쥐가 겨우내 먹으려고 갈무리해서 땅에 묻은 씨앗 가운데 한 알이 자라난다고 하더군요). 도토리 한 알은 시골아이랑 한참 신나게 놀다가 제 갈 길을 찾아 조용하면서 따순 흙 품에 안겼고, 흙 품에서 씩씩한 새 삶을 일굽니다. 시골아이는 숲길을 걷는 즐거움을 듬뿍 느끼며 도토리를 만납니다. 도토리 한 알은 흙 품에 안기며 자라는 즐거움을 느끼기 앞서 시골아이 하나를 만나 신나게 놀았습니다. 시골아이와 도토리는 자연이라는 너른 품에서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살가운 벗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길 잃은 도토리

마쓰나리 마리코 지음, 고향옥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7


#그림책 #그림읽기 #책읽기 #삶읽기 #자연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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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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