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못 보고 가는 거 자전거는 보고 간다

[우리나라 해안선 1만리 자전거여행 20] 부안 격포에서 곰소까지

등록 2010.10.08 17:00수정 2010.10.0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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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월)

어제 저녁 해가 진 뒤로 1시간 가량 어둠 속을 달렸다. 새만금방조제에서 채석강이 있는 격포까지 약 15km. 중간에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변산반도의 해안도로는 가로등이 없었다. 그런데다 차량이 드문 편이 아니어서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한동안 어둠이 깔린 거리에 서 있으려니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서 다시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탔다. 격포까지 약 10km. 천천히 간다 해도 1시간이면 충분히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변산해수욕장을 벗어나자 그나마 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이정표를 꼼꼼히 살폈다. 이정표를 놓치면, 길을 잃을 게 뻔했다. 무심결에 격포를 지나칠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라리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녹색 이정표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변산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성낙선

그러다 어느 한 순간, 1km 정도 떨어져 보이는 거리의 짙은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대규모 리조트였다. 그 리조트가 어둠 속에서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곽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는 왜 이런 곳에 저처럼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네온사인은 사막에 건설했다는 환락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시켰다. 그 이국적인 도시가 바로 격포항과 채석강을 지역의 대표 명소로 내세운 관광지, 격포였다.

농촌인지 어촌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한 시간 넘게 어둠 속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높은 건물 아래 불빛으로 번쩍이는 거리로 들어서는 게 상당히 어색했다. 나 또한 도시인임이 분명한데 격포가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건 빛에 적응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던 데다, 격포가 단지 도시의 유흥지를 본 따 옮겨 놓은 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빛이 사라진 격포, 비로소 격포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늘 아침, 불빛이 사라진 관광지 격포에서 눈을 떴다. 비로소 격포가 좀 더 격포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 눈엔 그나마 화장기를 지운 격포가 더 편하고 익숙해 보이는 까닭이다. 소박한 마을이었던 격포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그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하루, 날이 맑을 줄 알았다. 단지 바람이 좀 거세게 부는 게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숙소 밖을 나서서 채 100미터를 가지 못해 또 비를 맞는다.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맘 놓고 숙소를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오다니. 비가 오니까 바람도 더 거칠게 부는 기분이다.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치고 말 비 같아 보이지 않는다.

숙소를 나선 지 10분도 안 돼 다시 숙소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고, 다시 거리로 올라선다.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하늘을 가만히 서서 올려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박복한 내 인생, 이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려니 체념하고 만다.

격포해수욕장 앞, 파도가 뜻밖에 높다. 해변으로 달려드는 파도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짐승 소리를 닮았다. 바다가 무슨 이유인가로 잔뜩 성이 나 있다. 가까이 다가서기 두렵다. 2, 3십 미터 밖에서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도 바닷물이 바람에 묻어 날아오는 걸 피할 수 없다. 해변을 걸어서 채석강으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해 보인다.

 채석강. 성난 파도. 산책로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
채석강. 성난 파도. 산책로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성낙선

할 수 없이 채석강 위를 오르는 산책로로 발을 옮긴다. 그 산책로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장관이다. 바다가 온통 일어섰다 앉았다, 위로 솟구쳤다가는 아래로 푹 꺼졌다 하면서, 인간이 사는 땅을 뒤엎어 버리지 못해 악다구니를 치는 형국이다. 그 몸짓이 매우 격렬하다. 아무래도 지난 밤 용이 되려다 만 이무기 한 마리가 바다 속 어디에선가 격한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울분이 느껴진다.

궂은 날도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광경을 다 보게 된다. 이 시간 비가 온다고 계속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면, 하루 종일 바보상자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바람에 바위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는 채석강을 가까이 내려가 자세히 올려다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는다. 오늘 내가 본 채석강은 내 생애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어쩌면 이것도 복이다. 인간사 모두 다 새옹지마다. 좋지 않은 일이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다.

 격포항
격포항성낙선

채석강을 떠나 격포항으로 간다. 격포항은 채석강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되는 거리에 있다. 격포항은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기능어항'으로 탈바꿈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다. 그 내용 중에 '해양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곳곳에 땅바닥을 뒤집어 놓은 탓에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다. 이곳 역시 새만금방조제 북쪽 진입로 곁에 있는 비응항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변산반도 해안가는 자동차 타고 휙 지나갔으면 놓쳤을 절경

 이순신 세트장
이순신 세트장성낙선

격포항에서 궁항을 향해 가는 길에 잠시 '이순신 세트장'에 들른다. 이순신 세트장이 서 있던 바닷가가 꽤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된다. 몽산포에서 장길산 세트장이 흉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걸 보고 온 터라, 그새 이순신 세트장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폐허는 아니어도,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건 피할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언덕 하나를 넘어갔는데 의외다.

상당히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드라마 촬영 초기의 상태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바닷가에 서서 장시간 모진 비바람을 견딘 드라마 세트장치고는 의외로 온전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트장 앞 바닷가 풍경도 여전하다. 바람에 군기가 나부끼고, 망루 앞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세트장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이순신 세트장
이순신 세트장성낙선

 이순신 세트장
이순신 세트장성낙선

금방이라도 어디에선가 조선군 병사들이 나타나 왜적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진격을 외칠 것 같다. 세트장 앞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이 거북선을 닮은 것 또한 심상치 않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촬영 장소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근처에 전라좌수영 터가 있다.

 이순신 세트장 앞 거북선 모양 바위
이순신 세트장 앞 거북선 모양 바위성낙선

 변산반도 해안도로 풍경
변산반도 해안도로 풍경성낙선

이순신 세트장뿐만이 아니라, 변산반도를 돌아가는 해안가 도로는 절경 아닌 곳이 없다. 어제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까지, 밤새 어둠 속을 달리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해안도로는 변산반도 안에서도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소문이다. 어두운 도로 위를 달리느라 그만 그 절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해안도로를 마저 돌면서 변산반도에는 그곳 말고도. 절경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변산반도 수려한 산세
변산반도 수려한 산세성낙선

이런 곳을 자동차를 타고 휙 지나가는 건 변산반도를 그냥 눈감고 지나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중요한 장면마다 꾸벅꾸벅 졸면서 보는 것과도 같다. 변산반도는 해안뿐만이 아니라 산세도 매우 수려하다. 산과 바다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풍경이 제주도의 맑은 바다와 강원도의 해안 절벽을 적절히 합쳐 놓은 것 같다.

변덕스러운 날씨, 이무기인들 맘이 편할까

 모항 포구
모항 포구성낙선

모항에 도착했을 땐, 파도가 무척 잔잔해져 있었다. 예측하기 힘든 날씨다. 그때 이제는 날씨가 개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곰소에 도착했을 무렵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서 날씨도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몸이 더 으슬으슬한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더 이상 비를 맞는 게 무리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비 맞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헤아리는 게 쉽지 않다.

 곰소 젓갈단지
곰소 젓갈단지성낙선

오늘은 일찌감치 여행을 접고 곰소 젓갈단지 근처의 한 모텔로 철수한다. 빗물과 땀에 전 몸이 그야말로 젓갈이 되기 직전이다. 그 후로도 계속 비가 내린다. 저녁을 먹을 무렵엔 창 밖에서 장구를 두들기는 것 같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도로 위에서 아직도 저 비를 맞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순간이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이무기도 적응하기 힘든 날씨라고 해야겠다. 날씨가 이렇게 변덕이 심한데 이무기인들 맘이 편할까?  바다가 화난 기운을 띠고 있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오늘 달린 거리는 31km, 총 누적거리는 1352km다.
#채석강 #격포해수욕장 #격포항 #모항 #이순신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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