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 반 넘게 틀려서 엄마가 울었어요"

엄마가 울면 슬픈 아이... 이젠 힘내서 공부하겠지요?

등록 2010.10.22 13:58수정 2010.10.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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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로비에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책가방을 멘 키가 작은 여자아이가 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삼학년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이쪽저쪽을 두리번 거리다가는 이쪽으로 쪼르르 오더니 "할머니이" 하면서 친구의 가슴에 포옥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함박웃음을 띄우고 손녀의 작은 얼굴에 자기 뺨을 부비다가 말했습니다.


"학교 끝났으면 곧장 집으로 가지 여긴 왜 왔어?"

그러자 아이는 무안했던지 내 얼굴을 힐끗 보았습니다. 내가 "참 예쁘구나"하고 웃자 그제서야 "안녕하세요"하고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친구는 그런 아이 기분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여긴 왜 왔냐니깐?"    
"할머니랑 같이 가려구요. 어제밤에 엄마가 울었어요, 내가 문제집을 풀었는데 반 넘게 틀려서." 

친구는 어이구 저런! 하는 눈빛이다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나 역시 젊은 엄마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눈물이 다 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너 보는데 울었어?"
"아니, 엄마가 돌아서서 주방으로 갈 때 난 봤어 눈물 난 거."


"그니까 공부 좀 잘하지않구."
"엄마가 우는 거 보니까 막 슬펐어요. 오늘 나 학교 간 다음에 또 울었는지 몰라. 그니까 할머니, 나랑 집에 같이 가요."

손녀는 울상입니다. 손녀가 울상이자 안되었던지 친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습니다.

"엄마 몰래몰래 게임만 하니까 그렇지이. 오늘두 문제집 풀거아냐? 어제보다는 잘해야 해. 할 수 있지?" 
"반은 안 틀릴 거예요."

손녀가 울상을 풀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 천진스런 모습을 보다가 내가 친구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습니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먹을 거나 좀 사가지구 가라구."
"걘 도넛을 좋아해. 사가지구 가야지, 그걸루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야."   

그러자 손녀가 아하 참 그렇지 하는 눈빛이더니 얼른 책가방을 벗어놓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착 접힌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할머니에게 보입니다.

"할머니, 내가 내 돈으로 도넛 사가지고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야, 야, 천 원 가지구 뭘 사! 기다려 봐."

친구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손녀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손녀가 햇죽 웃고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아났습니다. 

"저렇게 좋을까. 공부나 좀 잘하면 얼마나 좋아. 지 엄마가 저녁마다 끼고 가르쳐도 그 타령이지 뭐야. 오죽하면 눈물이 다 났겠어."
"이제 잘 하겠지이. 엄마 눈물이 자극이 됐잖아"

"젊었을 때 난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는 하루종일 시장에서 가게에만 매달렸었다구. 그래두 세 눔 다 지들이 알아서 대학까지 갔다구. 자식들 공부 때문에 운 적은 없구 영감이 바람 났을 때 한 번 울었었지. 그때 대학생이던 딸애가 내 손을 꼭 잡고는 '엄마가 울면 나 아무것도 못해' 하는 거야. 그래서 얼른 눈물 뚝 했었지."

그때 친구는 대학생인 딸애 그 말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시장에 나가서 굳게 닫았던 건어물 가게문을 열고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억척을 떨면서 열심히 장사를 했던지 소매상을 도매상으로 바꾸었고 수입도 남편과 같이 장사를 할 때보다 몇 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딸애가 꾸준히 설득을 해서 바람이 났던 남편도 돌아왔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노부부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요일이면 나란히 다정한 모습으로 성당에 나오고 있습니다. 

불룩한 비닐백을 들고 손녀가 돌아왔습니다. 숨차게 달려와서 얼굴이 발그레 합니다. 예쁜 꽃송이 같습니다. 손녀는 얼른 책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엄마를 만나고 싶은 모양입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단풍이 들기 시작한 가로수 저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 친구의 손녀는 공부를 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엄마 #문제집 #할머니 #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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