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것'으로 남은 유일한 개성 두 가지

[서평]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 (2000, 책세상)

등록 2010.11.01 15:10수정 2010.11.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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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은 친절한 책이다. 친숙한 주제이지만 사실은 복잡한 문제라는 걸 보여준 다음 그걸 다시 쉽게 풀어내 준다. 친숙한 주제를 전문용어로 낯설게 만들어 놓는 것을 학문으로 여기는 관행을 생각하면, 탁석산은 친절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친절함은 계속된다. 그 쉬운 설명의 요약본까지 제공한다. '들어가는 말'은 143쪽의 내용을 다섯 쪽으로 줄여 놓았는데 이 또한 압권이다. 책 전체가 파닥거리는 한 마리 생선이라면 이 요약은 비린내까지 발라낸 완벽한 뼈대다. 과잉 친절일까? 아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와 함께 '들어가는 말'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저자의 배려다.


제목만 보고서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의 정체성'이 뭔지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들 할 것이다. 사실 저자도 "이 책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이라고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어도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한국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만 나온다. 그렇다. 이 책은 한국 정체성의 '내용'이 아니라 그 '정의'를 다룬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역사의 내용을 서술한 게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내린 것과 같다.

저자는 1, 2부에서 개념 정지작업을 거친 후, 3부에서 한국 정체성의 정의를 내린다. 그의 한국 정체성은 "오늘날 한국 대중이 주체적으로 공유하는 창의적인 집단 개성"이다. 깔끔한 개념정의다. 그런데 이 정의에 부합되는 한국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건 이제부터 한국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을 뒤져가면서 차근히 찾아보아야 하는데, 각 영역에서 공통점을 찾아야 하므로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이 정의를 끌어내기 위해 밟은 과정이다. 탁석산은 서양 철학자 이름을 줄줄이 대지 않으면서도 철학의 맥락 속에서 관련 개념을 꼼꼼히 검토한다. 논의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에도 비약은 없으며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다. 어쩌면 이 책은 '한국의 정체성'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철학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방법론 교과서일지도 모르겠다.

탁석산의 방법론 덕분에 덤으로 챙길 수 있는 부산물이 꽤 많다. 첫째, 정체성이라는 게 생각보다 미끄러운 주제다. 둘째, 정체성에 관심 갖는 것은 우리가 약자라는 증거다. 셋째, 약자에게는 정체성 인식이 생존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넷째, 집단 정체성은 개인 정체성과 다르다. 그래서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를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 시원이나 원조는 정체성과 상관없다. 여섯째, 우리는 중국과 일본, 미국과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을 이중 잣대, 혹은 다중 잣대로 보고 있다. 일곱째, 보편성은 허구다. 여덟째, 세계화란 미국화다. 아홉째,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라는 말은, 그 멋진 표현에도 불구하고, 알맹이 없는 허구다. 대충 추려도 이 정도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내용이 많은 만큼 각각에 대해서 자세한 논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실질적인 명제를 철학적으로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부산물에서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한국 정체성의 '정의'를 보자. 탁석산은 명시적으로 정체성 구성 요소로 '현재성'과 '대중성'과 '주체성'의 3가지를 들었지만, 이 책을 잘 읽어보면 3가지가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집단성'과 '고유성'과 '창의성'이 그것이다. 앞의 3가지가 충분조건이라면 뒤의 3개는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이 조건들을 '체'로 사용한다면 그간 논의됐던 한국의 정체성은 거의 다 걸러지고 만다. 이규태 등의 한국인의 정체성은 '집단성'에 걸리고, 대다수의 인문학/음악/예술은 '고유성'과 '창의성'에 걸린다. 활판 인쇄술과 도자기와 민요는 '현재성'에 걸리고, 판소리와 사물놀이는 '대중성'에 걸리며, 아악과 성리학과 한문학은 '현재성'과 '대중성'과 '주체성'에 모두 걸러지고 만다.

그러면 이렇게 촘촘한 정의에 맞는 한국의 정체성은 과연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런 정체성을 찾는 것이 향후 과제라고 한다. 경제와 정치와 사회와 음악과 미술과 연희를 관통하는 정체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런데 이미 파악된 정체성은 없을까? 나는 이 책이 이미 두 가지를 제시했다고 본다. 한국어와 샤머니즘이 그것이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열거하지는 않았지만 샤머니즘과 한국어는 저자의 6가지 기준을 통과하여 '한국적인 것'으로 남는 유일한 한국의 개성이다. 5천년 역사에서 겨우 두 가지 정체성이라니... 개탄스러운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한 가지도 확보하지 못해서 지구상에서 소멸된 민족과 문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한국어와 샤머니즘은 오늘날의 한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자 특징이며, 미래를 준비할 자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의 정체성은 모두들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샤머니즘을 정체성의 반열에 올리는 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미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 못지않게 샤머니즘이 오늘날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수용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라는 증거는 도처에 보인다. 철학관과 당집, 사주와 관상, 주요 행사의 길일 잡기나 고사 관행 등은 그저 눈에 보이는 증거들일 뿐이다. 더 미묘한 샤머니즘도 많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 개신교가 불교를 '접수'하는 방식이 토론을 통한 문화 전파, 혹은 무력침공이 아니라, '땅 밟기'라는 샤머니즘이다. 사회적 물의를 빚었으니 찾아가 사과도 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뉘우쳤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불상에 십자가를 그려오던 것이 이번에는 땅 밟기로 나타난 것뿐이다. 다음번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또 다른 형태의 샤머니즘일 가능성도 높다. 논증의 접점이 없고 무력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을 두고 탁석산은 한국 개신교 1백년 역사는 기독교가 샤머니즘에 잡아먹힌 역사라고 말한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은 훌륭한 한국 철학서다. 그것은 매끈한 방법론으로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깔끔한 정의를 내릴 뿐 아니라, 시험적으로나마 한국 정체성의 두 가지 예를 제시했다. 물론 저자의 정체성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한국어와 샤머니즘을 한국적 정체성의 예로 든 것에도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구체적인 명제가 제시됐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토론의 장이 마련된 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필요한 일은 샤머니즘과 한국어에 밴 한국적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는 일이다. 미신과 과학으로 불릴 수 있는 상반된 이 두 가지 문화가 어떻게 만나서 섞이고 싸우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를 모양 지웠는지 알아보는 것도 사뭇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공백 메우는 독서 중이기에 오래된 책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많습니다. 딴에는 중요한 문제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두고 있고, 가능하면 당면 이슈와 접목시키는 노력도 기울이려고 합니다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저자의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하는 것은 오랜 호칭을 피하고자 함이지 그분들의 인격이나 작품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공백 메우는 독서 중이기에 오래된 책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많습니다. 딴에는 중요한 문제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두고 있고, 가능하면 당면 이슈와 접목시키는 노력도 기울이려고 합니다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저자의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하는 것은 오랜 호칭을 피하고자 함이지 그분들의 인격이나 작품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한국의 정체성

탁석산 지음,
책세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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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미레 #뜻철학 #한국학 #탁석산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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