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한 유일한은 박용만의 멘토링을 받았다.
독립기념관
30세의 젊은 비즈니스맨 유일한이 북간도에서 부모를 만난 것은 1925년. 10살 때 박희병의 손을 잡고 태평양을 건너간 지 무려 20년 만이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보낸 1백 달러로 논을 사서 생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이 만주 벌판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셀 수 없었다.
유일한은 동포들의 질병 퇴치를 위해 제약사업에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중국인이었던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더 쉽게 했을지도 모른다.
1926년 그는 서울에 들어가 YMCA 안에 미국식 약방을 차렸다. 처음에는 염색약, 위생용품, 의약품을 미국에서 수입 판매했다. 차츰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플라민), 혈청 등 국민보건에 직결되는 약품들을 우선적으로 공급했다. 모르핀을 취급하자는 부하직원의 건의는 호통을 쳐 물리쳤다.
3년 후 유한양행을 설립해서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미국 제약회사들의 대리점이 됐고 주요 제약회사의 하나로 발전했다. 일제의 견제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유일한은 가족들을 데리고 193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유일한은 미국의 투명한 경영기법을 실천했다. 한국사회의 관행이기도 했던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검은 돈은 일체 거래하지 않았다. 대신 세금은 어김없이 납부했다. 정직한 납세는 미국 같은 곳에서는 비교적 일반화 돼 있으나 한국에서는 미련한 짓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얘기가 교과서에까지 실린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자산 면에서가 아니라 윤리 면에서 성공 모델이 된 것이다. 한국의 최고경영인들과 경제학 박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그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뽑혔다. 소년병학교에서 박용만은 생도들이 독립군 장교로서의 자질을 기르고 조국 근대화에 헌신할 것을 새기게 했다. 그런 정신교육을 이미 소년기에 철저하게 받았으니 유일한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뽑힌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교육 사업에 투자했다. 유한실업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 유한전문대학을 설립해서 7천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죽기 전 자신의 지분 주식을 모두 유한재단에 기증했다.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YWCA(한국여자기독청년회)에 기증함으로서 모든 사유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래 오직 할 게 없으면 사내자식이 숙주나물 장사를 한단 말이냐? 그건 아녀자들이나 할 짓이 아니냐?"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 숙주나물 사업은 돈을 많이 버는 큰 사업이에요."북간도에서 다시 상면했을 때 부자지간에 주고받은 대화였다. 미시간 주립대학을 다닐 때 유일한은 미국친구 월리 스미스와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키운 뒤 건강식품으로 판매했다.
졸업 후 1921년 상하기 쉬운 숙주나물을 통조림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라초이(La Choy)'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숙주나물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중국음식 '찹수이'에 많이 넣는 재료다. 통조림화 함으로서 각지의 중국음식점에 대량공급을 가능케 했다. 유일한이 부사장이었던 라초이 회사는 4년 만에 자그마치 50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다.
그 후 라초이를 그만 두고 보유주식을 팔아 5만 달러로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했다.중국에서 손수건, 타월, 식탁보 등을 수입했는데 한인이 세운 무역회사로는 가장 컸다. 그는 사장에 서재필, 부사장에 정한경을 영입했다.